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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ul 13. 2021

고모의 노래 ‘동숙의 노래’

내 자존감과 프라이드의 자양분이 되어준 고모의 헌신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는지 다행히 이듬해 대학시험에 합격하였다. 고모는 불안하다며 나오지 않았고, 나 혼자 대성학원에 가서 게시판에 붙은 나의 이름을 확인하였다. 종종걸음으로 학원에서 나와 대각선 건너편으로 동아일보사가 보이는 광화문 사거리 공중전화 박스에서 고모에게 합격소식을 전했다. 고모는 나에게 축하한다며 웃다가 이내 기쁨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후에 고모랑 같이 느긋한 마음으로 캠퍼스를 찾아가 운동장 안쪽에 입간판처럼 일렬횡대로 세워진 합격자 명단에서 나의 이름을 찾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고모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증명하였다.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또 한 번 허물을 벗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8년 10월 13일, 고모는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뤘고, 나는 아버지가 사준 역촌동의 아담한 집에서 동생들과 새로운 자취생활을 시작하며 각자의 길을 갔다. 재학 중 육군에 입대하여 29개월 만에 복무를 마쳤다. 교련 혜택 적용을 받아 복무기간이 약간 단축된 결과다. 복학 후 졸업과 동시에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이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수월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장남이자 장손인 나는 맞선을 100번도 더 본 끝에 아내를 만났다. 장손이라는 위치는 특히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여자가 고생한다며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단둘이 좀 잘 되다가도 상대방 어머니를 만나고 나면 그대로 끝나버리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한 역경(?) 끝에 중매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딸 낳아 기르며 직장에서 무사히 정년까지 일하고 퇴직을 하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언제나 높은 자존감과 프라이드(pride)를 갖고 살아왔다. 정신적으로 기가 죽거나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오래전 고모가 베풀어준 사랑과 헌신의 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안다.      




   내 나이 어느덧 예순다섯. 언제, 어디로 그렇게나 많이 먹었다는 것인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나이에 칠순을 맞이한 고모를 생각하며 아침 식탁에 앉았다. 아득한 옛날, 우리에게 태초의 고향인 원당굴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 고모, 그리고 삼촌들과 북적이며 같이 살았다. 아버지는 학교에 출근하기 전에 닭, 오리, 돼지 등 가축 먹이 챙겨주느라 마당을 가로지르며 바쁜 걸음으로 오갔고, 삼촌들은 마당을 쓸거나 소 먹이러 들에 나갔다. 갓방 부엌에 불을 때는 고모는 얼굴이 상기된 채 어김없이 부지깽이로 솥뚜껑 두드려 장단 맞추며 동숙의 노래를 몇 번이고 부르곤 했다. 애절한 노래 가사를 찬찬히 음미해보면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고모는 그 노래를 왜 그토록 유별나게 즐겨 불렀을까. 어쩌면 그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취미로 수년째 색소폰을 부는 친구 성식이에게 동숙의 노래 연주를 부탁했더니 동영상을 찍어 보내왔다. 나는 칠순을 축하하는 카톡 문자 아래  그 영상을 덧붙여 전송하였다.




사랑하는 고모님께 특별한 연주곡 하나 선물합니다.

내 친구가 부르는 색소폰 연주. 프로처럼 잘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한 연주라 정성이 가득합니다. 제목은 동숙의 노래. 젊은 시절 생각이 많이 나는군요. 조만간 아우들과 함께 한번 모시고자 합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래요. 큰 조카 올림.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마음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음~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 가는 서러운 마음

저주받은 운명이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음~음~ 뜨거운 눈물~~~”     


고모는 내가 보낸 문자와 동영상을 보고, 옛날이 그리워 눈물이 났다고 답을 보내왔다. 나는 여전히 눈물보가 금방 터질 것만 같아 전화할 수가 없었다. 고모보다 내가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고모가 먼저 전화를 했다. 우리는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실컷 웃었다.


   돌아보면, 고모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혼자 노래하며 아픈 속을 달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고모는 언제나 피부가 매끈한 얼굴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금방이라도 우스갯소리로 말을 걸어올 듯한 따뜻하고 다정한 표정이다. 그런 고모를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내 마음에도 언제나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스트레스를 쌓아두지 않는 나의 성질은 아마도 그런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날이면 그곳이 어디든 웃음이 넘쳐난다. 오늘따라 고모가 많이 보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GYZ4BNs8W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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