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어머니는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잘 알아들으며 또박또박 뒷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방금 전 한 이야기도 생각이 안 난다며 그냥 “몰라” 하고 대답하곤 했는데 의외였다. 갑자기 기억력이 호전된 것 같아 반갑기도 했지만, 좀 이상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나서 아내와 같이 백화점에 가 있을 때였다. 내일 친구 딸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 마땅치 않다면서 장롱문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던 올리비아가 매장에 얼른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나랑 같이 가볼까?” 동행할 의사가 있다는 내 말에 아내가 반색하며 기뻐했다. “당신, 피곤할 텐데 괜찮아?” “차로 금방 갔다 오면 되지 뭐” 기왕이면 남편이랑 같이 가기를 원하는 아내의 마음을 잘 알기에 오늘은 내가 일부러 선수를 쳐봤다. 역시나 반응이 예상대로 좋았다. 나는 마치 적시 안타를 친 것처럼 속으로 웃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전혀 내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덩달아 같이 나갈 준비를 했다.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치 허벅지 속이 텅 빈 것처럼 다리에 힘이 없었다. 허약해진 나의 체력을 잘 알고 있는 올리비아는 혼자 돌아보고 올 테니 앉아 있으라며 손가락으로 의자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소파에 앉자마자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팔순 중반인 노모에게 큰아들이 아침, 저녁 틈나는 대로 문안 전화를 드리는 것이 의례적인 일이라면, 거꾸로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전화는 대개 뭔가 일이 있다는 의미의 특별한 신호로 받아들인다.
지난 토요일,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얼굴 본 지가 오래인 동생들과 점심을 같이 하자며 내가 벙개를 쳤다. 막내가 점심시간 동안에만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그가 일하는 곳 근처 코다리찜 식당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발산역 7번 출구 앞이다. 거기라면 가장 많은 사람이 참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선택하였다. 그날은 선약이 있는 둘째만 빼고 넷이 모였다. 딸 없이 남자만 다섯인 우리 집 5형제는 수년째 매달 한 번씩 인사동에서 만나 점심 모임을 한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이제 헤아리기도 어려운 오래 전의 일이 되었지만, 아내와 제수씨들 사이가 벌어진 이후부터 그랬다. 그마저도 전 세계적인 코로나(COVID-19) 팬데믹(pandemic)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 5형제 모임도 몇 개월째 갖지 못하고 있었다. 벙개로 이례적인 장소에서 만난 오늘은 간이 잘 된 코다리찜이 막걸리 안주로 제격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 모시는 문제가 당연한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이번 추석 때 대표로 막내와 같이 내려가 어머니를 뵙고 온 셋째가 화장실 이전이 제일 급하다고 말했다. 시골 우리 집 화장실은 부엌 쪽 밖에 본채와 따로 지어져 있다. 가깝기는 하지만, 이용하자면 별채 같은 화장실까지 신발을 신고 다녀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므로 약간 불편하고, 밤이면 무섭기도 하다. 이제 연로한 어머니가 이용하기에는 불편하기도 하지만 위험하기까지 하니 화장실을 본채 내부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구조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언젠가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반면에 동생들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고향의 본가를 얼마나, 어떻게 수리하고 개조할 것인지 각자 내놓는 의견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뉘는 편이다. 동생들은 당장 어머니가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들을 고치자고 한다. 나는 기왕 손을 댈 바엔 구조를 약간 개조하는 리모델링을 하고 싶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어머니 이후를 바라보는 시각차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렇지만 무슨 돈으로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 본 적은 없었다. 동생들은 아마도 장형인 내가 결정을 내리고 실행해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렇다고 내가 홀로 할 만한 형편이 못 되어서 동생들의 기대에 응해주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미안한 마음이다. 돈 문제이다 보니 서로 허심탄회하게 꺼내놓고 말해본 일도 없었다. 나는 장형이라는 죄로 속으로만 끙끙거리며 시간을 허비해 온 것도 사실이다. 같이 얘기해도 될 일을 서로 입장이 곤란해 눈치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다리찜이 바닥을 드러내자 거기에 낙지 한 마리를 더 추가하여 안주를 보충하였다. 막걸리도 얼마나 마셨는지 옆에 빈 병들이 전시하듯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누가 꺼냈는지 모르지만, 32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조성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어느 날, 아버지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초저녁, 완행버스에서 내려 신작로 갓길을 따라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던 길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쓰라린 기억이다. 그런 청천벽력 같은 사건 처리를 마무리하고 난 뒤의 일을 그 자리에서 말하다가 동생들과 잠시 언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날 만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큰소리로 동생들을 질책하였고, 넷째는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했다고 셋째가 나중에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 피눈물 나는 사고 보상금과 퇴직금을 사후에 어떻게 배분한 것인지 그 과정을 내가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하자, 넷째가 죄송하다며 울더라는 것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때 그 일이 처리된 사연을 도무지 모른 채 나는 바보처럼 지내왔는데 뜻밖에 오늘 이렇게 듣다니 기가 막혔다. 막걸리로 고주망태가 되고서 내가 도대체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하철도 몇 번을 바꿔 타야 했을 텐데 핸드폰도 손에 꼭 쥐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날 밤의 귀가는 정말이지 기적 같기만 했다.
백화점에서 어머니 전화를 받고 나는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동생들과 만나 술 한잔 마시다가 우연히 아버지 돌아가신 사후 처리 얘기가 나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무슨 말이냐며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이어서 “근데, 엄마, 동생들은 다 아는 그때 일들을 왜 나만 모르고 있는 거여?” 어머니는 내가 뭔가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채고는 어느 때 보다 또렷한 음성으로 자초지종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만 같아 염려되던 어머니는 대충 말씀하시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심 놀라울 정도였다. 평소 형제지간에 항상 우애하며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우리 엄마 아니었던가. 아마도 내가 들먹이는 말을 듣고 자식들 사이에 혹시나 금이 갈까 봐 엄마는 약간의 심각성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당시 일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모두 당신의 뜻이었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더라도 큰아들인 내가 충분히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태연하게 덧붙이기도 하였다. ‘아, 그랬었구나!’ 그 당시 아직 집을 장만하지 못한 동생들에게 골고루 나눠줘야겠다는 당연한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씀이었다. 속 좁은 생각으로 보면, 아무리 좋은 의도였을지라도 엄마가 나만 쏙 빼놓고 동생들과 속닥속닥 나눠버린 일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혼자 궁금해하기만 한 내가 애처롭고 우습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과거지사가 된 이 일을 어쩌랴. 차라리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야 했다. 매장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올리비아가 몇 차례 나에게 손짓을 보내왔지만, 나는 계속 통화 중이라는 신호를 보내며 약 한 시간 가까이 어머니와 통화를 계속하였다. 결국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며 아내가 그냥 집에 가자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어머니와 전화를 끊었다. 내가 어머니와 통화한 사실을 알고 있던 아내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머니와 통화하던데 무슨 일이야? 어머니한테 왜 그렇게 퉁명스럽게 끊어?” 나는 아내가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전혀 엉뚱한 말로 화제를 바꾸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 엄마한테서 온 부재중 전화 표시가 내 전화기에 떠 있었다. 혹시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아니면, 늦게나마 나를 이해시키고자 생각한 것일까. 어머니 마음이 무엇일지 혼자 상상하다가 조심스럽게 전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 목소리가 어젯밤에 비하여 약간 가늘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마을 앞 회관에 나와 마을 아주머니들과 같이 계신다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동생들한테 안부 전화 왔었냐고 먼저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맥없이 대답하였다. 어제 엄마한테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고, 내가 오히려 괴로웠다. 차라리 어제 내가 전화로 한 말을 엄마가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엄마, 어제 나랑 전화한 거 생각나...?” 엄마는 “어제 니랑 전화했었냐?”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모르겄다”고 귀찮다는 듯 짧게 말하고 힘없이 웃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인지, 일부러 알면서도 모르는 채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전화를 끊을 즈음 언제나 덧붙이는 인사말이지만, 어제는 하지 못했던 멘트를 다시 하였다. “엄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