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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Feb 12. 2022

울 엄마의 하얀 전설

 철없이 왔다가 홀로 부르는 황혼의 자장가

   설을 앞둔 섣달그믐, 일찍이 6남 1녀 7남매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 온 울 엄마는 여러모로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명절은 모처럼 가족이 재회하는 계기가 되는 까닭에 마음은 벌써 고향에 홀로 계신 엄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득한 옛날, 교원양성기관인 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 울 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이자 장남이라는 태생적 멍에를 두른 채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함께 모시고 3대가 한집에서 살았다. 중매와 맞선이 대세였던 그 시절, 외할아버지와 외증조할아버지는 신랑집 식구가 너무 많아 아무래도 딸이 고생할 것 같다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러던 차에 할아버지의 뚝심과 끈질긴 설득이 주효해 혼사가 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진중하고 집요한 할아버지의 면모가 그려지기도  재미있고 반갑다. 엄마는 열아홉 살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를 그렇게 만나 연을 맺고, 1955년 12월 23일 신정부락에서 원당굴로 시집을 왔다.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은 본명 대신 친정 마을 이름에  택호()를 붙여 평생 신정 떡(댁)이라 불렀다. 집으로 오기 이틀 전, 신랑인 아버지가 먼저 처가에 장가를 가서 벌써 혼례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보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전통 관례대로 다음날 나란히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날이 하필 안 좋은 날이라며 주변에만류하는 바람에 하루를 더 묵고 온 것이다. 그로부터 햇수로 2년 후 삼짇날, 첫아들을 낳았다. 워낙 딸이 귀한 집이어서 혹시나 하고 기대하며 아래로 넷을 더 낳았으나, 끝내는  못하였다. 슬하에 딸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모녀간의 진득한 사랑과 정에 힘입어 울 엄마의 애달픈 삶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더 가벼워졌을지 모른다. 그런 팔자는 아예 허용되지 않았던 것인지 그 수수께끼를 알길 없는 가족들의 아쉬움도 은연중 컸다.



  

   코앞에 다가온 명절을 생각하던 중 고전 같은 옛날 우리 집 이야기가 갑자기 파노라마 영상처럼 기억의 스크린에 펼쳐졌다. 울 엄마의 드라마 같은 삶의 발자국이다. 딸 하나 없이 아들만 오 형제를 낳은 울 엄마는 맏며느리로 시집올 당시 이미 열한 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짊어져야 했다. 가녀린 소녀나 다름없는 젊은 나이에 시집의 그런 사정을 빤히 알고도 엄마는 겁이 나지 않았을까. 도망이라도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까.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인 큰 시아제는 엄마와 나이가 같은 동갑이었다. 그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막내인 시누이(나의 고모)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이였다. 까마득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엄마의 흑역사를 뒤늦게 아들이 회상해보는 후일담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할 뿐이다. 울 엄마는 타고난 성품이 유순했지만, 겉보기와 달리 당차고 책임감이 무척 강한 외유내강의 전형이었다는 점을 빼놓고서-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 설명하기가 어려운 대목이다. 식구는 가족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농사가 제법 많아서 우리 집에 고용돼 일하는 사람도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하루 세끼를 가족과 함께 먹으며 일을 했으니 같은 식구나 다름없었다. 엄마가 날마다 손수 밥을 지어 먹이는 식솔 자그마치 열네 명에 달하였다.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 아침식사 자리는 언제나 북적였다. 부엌이 달린 정재방과 그 너머 마루에까지 상을 연달아 펴고  둘러앉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아버지는 교사가 본업이었지만, 농사를 겸하는 가장으로 집안일을 챙기느라 특히 아침 시간이 가장 바빴다. 매일같이 어둑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머리맡 사각 책상에 조용히 앉아 하루 일과 계획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1. 닭 모이주기

2. 돼지 밥 주기 

3. 마당 쓸기...

아버지는 노트에 차례로 번호를 매겨가며 할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볼펜으로 반듯이 써 내려갔다. 넓은 마당을 몇 번이고 가로지르며 혼자 부리나케 집안 구석구석 일을 챙기는 루틴(routine)은 평생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과묵하면서도 일을 미루는 법 없이 성실하고 능동적으로 처리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상선약수(上善若水)와 다름이 없었고, 훗날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매일 새벽부터 아침 식사 때까지 아버지 혼자 일하는 시간은 마치 하루 일과로 고정된 제1세션(session)처럼 되풀이되었다. 새벽일을 마친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미 머릿속에 정리된 할 일들을 차근차근 지시를 하고 나서 출근길재촉하였다. 학교는 비포장 신작로 변을 타고 걸어서 아랫마을 구정굴 모퉁이를 막 돌면 저만치 눈에 보였고, 약 20분이면 닿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뒤로는 산이 감싸고 앞에는 하천이 흘러 배산임수(背山臨水) 형인 우리 동네 원당굴은 읍내로부터 4km 밖에 있는 농촌이었다. 방 네 칸과 대청마루 1칸짜리 기와집인 우리 집은 동네에서 비교적 규모가  축들었다. 큰방은 가운데에 중문이 설치돼 안방과 바깥방으로 나뉘어 사실상 두 개로 사용하였다. 그래도 그렇지, 신혼인 엄마까지  집에서 어떻게 열두 명 식구가 함께 살았는지 그때를 돌아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논농사, 밭농사가 계절과 절기에 따라 끊임없이 계속되고, 소, 돼지, 닭, 오리, 개와 고양이까지 키운 그 당시 우리 집의 분위기는 언제나 분주하고 시끌벅적하였다. 울 엄마는  많은 식구들을 위하여 혼신을 다해 뒷바라지하며 가계의 정상 운영을 도맡았던 숨은 주인공이었다. 젊은 시절을 그렇게 온전히 희생하고 견디며 감당해야 했으니 고통에 가까운 고생을 빼고 나면 무슨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으랴. 그 질박했던 세월은 삼촌들 다섯에 이어 막내인 고모가 1978년 10월 차례로 결혼하고 모두 분가하기까지 20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 진저리 나는 시간을 울 엄마는 딴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철 모르고 살았다며 시대를 증언하듯 말했다. 무던함, 책임감, 인내와 끈기,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심성 등 내 성격의 상당 부분은 엄마한테서 물려받은 듯하다. 비록 가사 일이 힘들었지만, 집안 어르신의 보살핌과 따뜻한 말씀이 있었기에 엄마는 그나마 용기와 의욕을 잃지 않고 모진 삶의 질곡을 버텨낼 수 있었다. 혼례를 성사시켰던 할아버지는 며느리를 위하여 가끔 일을 거들어주며 삼촌들 앞에 모범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그럴 때마다 우리 며느리 고생한다며 칭찬과 격려를 잊지 않았다. 자상하고 따뜻한 인품을 지닌 시아버지였다. 동갑인 작은아버지가 살며시 건네는 위로도 큰 힘이 되었다. 지나고 보니, 객지에 나가 공부하던 삼촌들은 형수인 울 엄마한테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반면, 집에서 일하며 같이 살던 삼촌들은 그렇지 못하고 많이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 아니면 마땅히 대가족의 살림을 해낼 사람이 없었던지라 세상 물정 모르는 자식들 알게 모르게 훔친 눈물도 많았다. 분가시켜주지 않는다고 장형인 아버지에게 거칠게 대들며 주먹까지 날린 삼촌이 있었는가 하면, 무슨 사연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꼬맹이였던 내가 버젓이 지켜보는 정재방에서 엄마와 큰소리로 다투다가 아뿔싸! 엄마의 헝클어진 머리를 권투 하듯 두 주먹으로 마구 가격한 삼촌있었다. 나는 그때 엄마가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삼촌의 발목을 붙잡고 모질게 대항하는 모습을 겁에 질려 쳐다보며 울기만 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퇴근하고 오시면 삼촌을 불러 크게 나무랄 줄 알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는 되레 방빗자루를 거꾸로 집어 들고 엄마의 목덜미를 마구 때리며 뭐라고 큰소리로 나무라기만 했다. 엄마는 서러워 울고, 어린 나는 또다시 경악하며 무서워 한참을 울었다. 온순하고 말이 많지 않은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나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마땅히 형수에게 행패를 부린 동생을 다그쳐야 했을진대, 마음 약한 아버지는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애꿎은 엄마한테만 화풀이를 하고 말았던 것이 아닐까...ㅠ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의 일들이다. 그나마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감싸주던 집안 어른이 세상을 떠난 후, 울 엄마의 고통과 고립무원 심정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잊히지 않는  평생의 상처이기도 하다. 그 일뿐이 아니겠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생전에 인색하고 정이 없었다는 말로 당시의 힘겹고 외로웠던 심경을 토로하듯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는 것처럼 삼촌들과 같이 살던 시절의 우리 집 역시 그랬다. 어려웠던 시대에 식구는 많고 살림이 넉넉지 못해 겪어야 했던 슬프고 아픈 기억이다. 창밖 중앙로에 쉼 없이 오가는 차량 행렬을 주시하던 나의 눈은 이미 뜨거운 물기로 촉촉이 젖으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전설 같은 삶을 살아온 울 엄마는 이번 새해를 맞아 어느덧 팔순 중반을 넘어가는 연세가 되었다. 체력도, 기력도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정하고 건강한 편이어서 다행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간 추석이나 설 등 대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는 자식들 집으로 역귀성을 하였다. 객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제각각 고향 찾아 먼길을 오가느니 차라리 당신 혼자만 움직이면 된다며 기차나 고속버스를 즐겨 타고 왔다. 그런 역사도 벌써 십수 년이 되었다. 뜻밖이고 전례 없는 코로나(COVID-19) 대유행이 시작된 이후부터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각자 집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각별한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엄마가 힘들게 객지의 아들 집을 찾아 단신 역귀성하기가 부담스러운 나이라는  고려해야 했다. 올해는 급기야 보건당국이 나서 고향의 가족과 친지 방문을 자제해달라며 전 국민에게 호소하는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벌써 30여 년 전, 아버지가 퇴근길에 불의의 사고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버린 후부터 줄곧 홀로 고향집을 지키며 살아온 울 엄마. 자식들이 모두 결혼을 했건만, 그 누구도 엄마 마음 편하게 모시고 살아본 적이 없다. 항상 죄스럽고 가슴만 저릴 뿐, 이도 저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거듭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시아제, 시누이와 같이 살았던 옛날이, 장성한 자식들 지켜보는 지금이나  엄마는 여전히 외롭다. 평생 그런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운명인가 싶어 때론 서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친구가 있는 우리동네서 사는 게 제일 편하다고만 한다. 자식들 듣기 편하라고 엄마가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자장가 같기만 하다. 요즘 전화를 하면 말미에 "너네 식구들끼리 잘 살아라"는 말을 부쩍 자주 듣는다. 왠지 이제 더 이상 자식과 같이 살아볼 미련을 거두체념해버린 듯 단호한 목소리로 귓전에 들어와 박혀 먹먹하기만 하.


   코로나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기로서니 이번 설을  어머니 혼자 쇠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며 울 엄마의 지난날을 돌아보니 너무나 짠하기만 했다. 설을 사흘 앞둔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출근길에 엄마한테 문안전화를 한 셋째가 오 형제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엄마가 집에서 넘어져 발목을 다쳤다는 것이다. 금세 동생들 반응이 이어지며 카톡방이 달아올랐다. 엄마한테 전화를 하고 어찌 된 상황인지 물었더니 복숭아뼈 주변이 좀 붓기는 했지만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안티프라민 바르면 다 나을 거다." 하지만, 엄마 목소리는 다른 날보다 힘이 없고 가늘게 떨리는 듯했다. 청진기처럼 전화기를 귀에 대고 엄마의 상황을 살피는 나의 기분이 불편하고 불안해졌다. 낼모레가 설인데, 자식들 하나 없이 집에서 혼자 보낼 생각을 하니 서러운 마음이 솟구쳐 그런 것 같았다.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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