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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Feb 20. 2022

고향에는 언제나 혼자서 갔다

울 엄마와 함께한 일주일

   승용차로 달려 5시간 만에 고향마을 진입로에 들어섰다. 시계는 이제 막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그 시각 즈음이면, 어르신들이 한가하게 세상 잡사를 얘기하며 동각에 모여 있을 텐데,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투명 유리로 된 출입문 손잡이는 마치 수갑을 채운 듯 쇠고랑 줄이 뱅뱅 감겨 굳게 닫혀있었다. 사람들이 이제 막 어디론가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시간마저 정지된 듯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였다. 예전 같으면, 사람들이 일터에 나가고 없더라도 어디선가 가끔 개나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올 법도 한데 그런 기미조차도 전혀 없었다. 2년째 계속되는 코로나(COVID-19) 팬데믹(pandemic)이 바꿔놓은 고향의 전경은 사뭇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적막하고 쓸쓸하기까지 한 것이 마치 한시(詩)에 등장하는 황량한 풍경처럼 다가왔.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온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모든 길엔 사람 자취가 끊어졌구나.

                   - 중국 당나라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한시 '강설(江雪)' 중에서 -

                                                                        

코로나 방역조치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빈틈없이 시행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나는 잠입하듯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 



   큰아들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기분이 들뜬 어머니는 벌써 시장에 다녀와 식당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꼬막무침이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참꼬막을 구하고 싶었는데, 품귀현상으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바람에 대신 세꼬막을 사 왔다고 했다. "엄마, 세꼬막도 맛있어. 근데 힘들게 뭐 이런 걸 사 왔어~~~!"  나는 속으로 좋으면서도 그렇게 말하며,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얼굴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리고 차에 싣고 온 짐을 꺼내왔다. 시어머니 드리라며 아내가 만든 반찬과 전, 간편하게 식사 대용으로 드시라며 손자 손녀가 반반씩 돈을 내 장만한 인스턴트식품들이었다. 호박죽, 팥죽, 버섯죽, 전복죽, 시리얼, 양갱, 사과주스... 혼자 밥해먹는 할머니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자며 준비한 선물들이다. 엄마는 눈앞에 펼쳐진 먹을 것들을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엄마, 복숭아뼈 주위가 부었다며..., 어떻게 넘어졌길래 그래...?" 오른쪽 발 양말을 벗겨보니 퉁퉁 부어 있었다. 미리 가져간 연고를 꺼내 골고루 발라드렸다. 그럼에도 엄마는 안 아프니까 병원에는 안 가도 된다고 했다. 다만, 무릎 관절이 더 아프다고만 했다. "엄마, 이 나이에 혹시 뼈에 금이 가면 큰일 나~. 이런 건 병원에 가서 꼭 진단을 받아봐야 돼." 당장 내일 정형외과에 가기로 하였다.




어둠에 잠기는 마을 앞 매봉산

   해가 지기 전, 엄마가 비닐봉지에 담아준 소주 한 병과 잔, 그리고 약간의 안주를 손에 들고 아버지 산소에 갔다. 묘역을 둘러본 뒤, 알현하듯 절을 하기 위해 묘를 바라보며 바르게 섰다. 아들이 온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낮으막한 소리로 나에게 묻는 듯하였다. "혼자 왔냐...?" 난감한 얼굴 얼버무리는 나의 대답에 심히 실망하면서도 감정을 감추고자 애쓰던 아버지의 그때 표정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며 그냥 고개를 숙이고서는 곧 잔디머리를 묻듯 절을 하였다. '아버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라 절을 한 채로 잠시 기다려야 했다. 내가 결혼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생전에 손자를 딱 한 번 봤다. 고생만 했지 자식과 더불어 행복을 느껴볼 새도 없이 아버지는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그래서 더 짠한 울 아버지 생각에 한없이 죄스럽고 가슴이 저미었다. 돌아서서 바라보니 저만치 구정굴 모퉁이 근처 신작로에도, 건너편 매봉산에도 벌써 어둑어둑 밤이 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특히 꼬막무침을 그릇이 넘치도록 고봉으로 담아 저녁 밥상을 차렸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의 마음은 전혀 변화가 없다. 밥도 그렇고, 국도 그렇고, 반찬까지 아들에게 맛있는 음식 많이 많이 맥이고 싶은 그 애틋한 심정, 도저히 말릴 수가 없다. 오랜만에 엄마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은 아담한 식탁 위의 반찬들을 보며 나는 연신 군침을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나의 입맛에 맞고 맛있는 성찬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설레는 순간이었다. 엄마가 먼저 수저를 드는 걸 살핀 후 살며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제일 먼저 꼬막무침에 손이 갔다. 엄마는 내가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서 입에 넣으며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만 볼 뿐 바닥이 나도록 당신은 하나도 먹지 않았다. 알맹이를 볽아먹은 꼬막 껍데기도 다시 한 그릇이 되었다. 엄마가 차려준 밥이 너무 많기는 했지만, 나는 덜어내거나 남기는 일 없이 일부러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밥상이 곧 엄마의 사랑이니까. 배가 너무 불러서 하루 두 끼만 먹은 날도 있었다. "엄마, 설거지는 내가 할 거여~" 엄마는 아들의 뜻밖의 말을 듣고 순간 웃더니 그럴 것 없다고 저지하며 벌써 손목을 걷어올리고 있었다. 그러시지 마라며 나는 엄마의 양쪽 어깨를 살며시 누르고 싱크대 앞에 나섰다. 수도꼭지를 살며시 틀고 큰 그릇에 세제를 푼 다음 수세미를 들고 그릇을 닦기 시작하였다. 연로한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밥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일을 언제까지 지켜봐하나. 그건 오히려 귀찮고 힘들게 하는 일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이제 그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아들들이 입 모아  다짐이었다. 하지만, 내가 설거지를 딱 이틀하고 난 뒤 엄마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설거지하는 동안 안방에서 혼자 텔레비전(TV)을 보고 있자니 별 생각이 다 들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며느리는 안 오고, 아들만 오는 건 도무지 반갑지가 않더란다.  아니겠는가. 벌써 오래전, 안 와도 좋으니 제발 싸우지 말고, 니들 식구끼리 마음 편하게 살라던 엄마의 선언 같은 한마디에 우리는 속도 없이 너무 충실하게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가슴 아프지만, 나는 지난날의 힘겹고 무력했던 일들일랑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고향 가는 길은 담담하거나 착잡한 경우가 더 많았다. 잘 모셔보자는 마음보다는 소싯적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엄마한테 가서 밥 얻어먹고 오는 일만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포 해변도로에서 바다를 보니 가슴이 탁 트인 느낌이었다.


   평생 뒤 돌아볼 새 없이 온갖 식구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으로 일관한 삶이어서 그런지 엄마는 그런 감옥 같은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은 듯 기회만 되면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오늘은 내 차로 인근 남해안 맛집을 찾아 드라이브하기로 하였다. 삼합 먹으러 장흥에 갔으나 마땅한 집을 찾지 못하였다. 동생이랑 같이 왔으면 쉽게 찾았을 텐데 아쉬웠다. 고려청자와 다산 유적지로 유명한 강진으로 옮겨가서 갈비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거꾸로 돌아오는 길에 보성 봇재 녹차제품 가게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카운터에 앉은 아주머니가 시음하라며 녹차를 미니 주전자에 반쯤 담아 가져다주었다. 나는 아내가 주문한 녹차비누를 먼저 산 다음 엄마랑 창가에 나란히 앉아 푸른 녹차밭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즐겨 다녔던 율포의 해수녹차탕을 지나다가 잠시 해변도로에 내려 탁 트인 하늘과 바다를 쳐다보았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조성을 지나 열가재를 내려올 무렵 바로 오른쪽 산기슭에 9홀 골프장과 요양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여기에 요양병원이 있네?" 그러자 엄마는 우리 동네 사람들도 입원해 있다며 안동떡, 봉강떡, 당촌떡등 동갑쟁이 세 사람과 아랫집 인천떡을 손가락으로 차례로 꼽으며 헤아렸다. 그중 봉강떡은 하두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 병원에서 더 먼 데로 보내버렸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거기가 어디인지 동네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엄마 친구들의 근황을 듣는 나의 마음은 아프고 서글펐다. 엄마는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유람하듯 여기저기 다니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시간이 좋았다고 말했다. 요즘 울 엄마의 행복은 그런 곳에 깃들어 있었다. 달리는 도로에 차량이 뜸하고 한적해서 엄마랑 편하게 얘기하기가 더욱 좋은 하루였다. 세상이, 우주가 우리 모자(母子)의 한가로운 시간을 지켜보며, 주위에 '쉿! 조용히' 싸인을 유지한 채 힘껏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의 우리 집 마루에 따스한 햇볕이 깃든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동네에는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지속 가능성이 있는 발전이라 해야 할지, 소멸로 가는 과정인지는 아직은 예단하기 일러 보였다. 친구가 살았던 우리 집 바로 옆집은 이미 헐리고 나대지가 돼 누군가 채소농사를 짓는 밭이 되어 있었다. 그 아래 규모가 더 작은 집에는 인근 2년제 학교의 여교사가 혼자 월세를 살고, 주말이면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 아랫집은 인천떡이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비어 있다. 우리 뒷집에는 외지인 목수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대궐 같았던 대밭집도 지금은 사는 사람이 없어 폐허나 다름없이 방치된 모습이었다. 그 밖에도 빈 집들이 여럿이라고 들었다. 반면, 마을 앞쪽에서는 성공한 기업인이 된 한참 후배가 넓은 대지에 스위스식 전원형 단독주택 2채를 멋지게 지어 놓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한 채는 어머니가 살고, 다른 한 채에는 처가가 산다고 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그가 마을에 전자제품 등 공용물품을 여러 번 제공하는 한편, 도로를 포장하는 등 기여하는 바도 크다며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마을은 이제 친척, 친구들이 모두 사라진 지 오래고 거주여건도 상당히 생소하고 낯선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 가운데 남향집 우리 집은 옛 모습 그대로를 잘 간직한 채 건재한 편이다. 이제 내 나이 60 중반에 접어들면서 집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차라리 혼자라도 고향에 내려와 책 읽고 글 쓰며 노년을 보내면 좋지 않을까. 어차피 고향에 올 때는 나는 언제나 혼자인 인생이었지 않나. 누구나 결국은 혼자 가는 것이라고도 했지. 오래전부터 은퇴 후 나의 삶은 고향집과 아내가 사는 집을 번갈아가며 며칠씩 사는 셔틀 라이프(Shuttle Life)가 좋겠다며 그려보곤 했다. 열심히 일한 베이비 부머(baby boomers)들이 이제는 밀도 높은 서울에서 물러나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을 듯싶다. 주거문제로 끝없이 서로 힘들게 하는 어리석은 굴레를 벗어나는 길이 혹시 거기서 열릴지도 모른다. 쉐비, 그대는 인생의 말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 작정인가. 석양에 고향이 나한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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