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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Mar 05. 2022

아버지의 눈물

나의 일기 : 1989년 9월 17일 일요일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학교 선생님이 매일 일기를 쓰라는 숙제를 내준 것이 그 시발이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니 하루도 빠짐없이 쓰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1967년 4월 10 월요일 날씨 흐림". 맨 처음 일기장 첫 페이지에 연필로 쓴 날짜가 희미하게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때 내가 처음 일기를 쓴 날이다. 내 일상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한 데뷔작이다. 그 일기장 커버 안쪽에 담임선생님이 만년필로 쓴 짧은 메모가 있었다. 일기 검사를 한 흔적이다.                                                       

"주의" 1. 매일 계속하여 좋았으나 글씨만 띄어쓰기를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임
          2. 글씨를 더 크게 써보자.
내 생애 첫 일기(1967.4.10.월요일)

   숙제 검사를 받으며 들었던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가 일기를 꾸준하게 쓰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도 꾸준하게 쓰는 습관은 바로 그때의 숙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누릿 누릿한 종이눌러쓴 글씨가 돋보기로 보아야 할 정도로 빛바랜 초등학교 때 일기장을 펼쳐보면 마치 고문서를 다루는 듯 조심스러워진다. 글 솜씨를 떠나 내가 살아온 날들의 기록은 고스란히 나와 가족의 발자취로 남았다. 박물관의 보물만큼 소중하다. 22년 후, 아버지와 같이 보낸 부자지간의 마지막 만남이 돼버린 그날의 일기는 하늘 아래 가장 슬픈 기억으로 박제되고 말았다. 1989년 추석을 맞아 고향에 다녀온 직후 쓴 일기는 그래서 너무나 특별하다. 그때 일기를 뼈대로 삼아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당시 이야기를 보태 여기에 옮겨본다.


   금년 추석은 양력으로 9월 14일 목요일이다. 13일(수)과 15일(금)도 연휴로 되어 연 3일간의 충분한 시간을 갖는 최초의 추석 명절이 아닌가 싶다. 직장마다 제각각 사정이 다르겠지만, 우리는 샌드위치가 된 토요일(16일)덧붙여 쉬지 않고 원칙대로 정상 근무를 한다.(그때 당시는 주 5일 근무제가 아니어서 토요일은 오전만 일하는 반공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3일간의 연휴 첫날,  숙직에 걸리고 말았다. 고향에 가야 하는데 걱정이 태산이었다. 당직근무를 순번에 따라 정하는 것이어서 재수가 없다고나 할 뿐 달리 항변할 여지는 없다. 명절 연휴기간은 당직을 바꾸기도 어려워 참 난감하기만 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추석 당일인 14일 아침 일찍 귀향을 서두르기로 하였다.

 



   아내는 이번 추석에도 시골에 못 간다고 일찌감치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명절이 돌아오면 촉발되는 그녀의 그런 태도가 못내 섭섭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나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여러 차례 달래기도 했다. 결혼하고 이제 겨우 두 번째 맞는 추석이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버젓이 계시는 고향 시댁 가지 않겠다는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우리 부부 사이시베리아 얼음처럼 살벌하게 얼어붙어버렸다. 서로 감정이 극도로 고조돼 출발하는 날까지 하루하루 보내는 시간은 전쟁같이 치열하 산만하기만 했다. 그래도! 약간의 틈이 보이면 같이 가자고 설득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결혼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시부모를 본 것이 두세 번이나 됐을까, 그처럼 정이 들 새도 없는 짧은 시간이었건만 고부지간에 움이 트는 괴상한 거부감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옛날 울 엄마가 혼자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아내가 느낄 중압감 또한 이해가 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삼촌들이 모두 분가해 나가고 이제는 오직 우리 부모형제들만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 모이면 거의 열 명에 가까워 여전히 적은 식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 우리 집에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대도시 태생인 아내는 중학교 교사 생활하느라 부엌일을 해본 적 별로 없고, 몸도 허약한 편이다. 이 사람이 맏며느리 역할을 감당해내기가 내심 버겁기도 했을 거라는 짐작은 간다. 그렇더라도 경우를 챙기지 않는 것은 아무리 전후좌우 사정을 살펴보더라도 사려 깊지 못하다는 생각에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어쨌든 나의 체면은 출발도 하기 전에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져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도 별수 없이 나는 고향에 혼자서 가야 했다.

 


  

   황금 같은 연휴 첫날을 별 의미도 없이 집에서 보내고, 오후 늦게 당직근무차 안양 평촌에 있는 사무실로 갔다. 어차피 채워야 할 시간을 때우기 위해 TV를 켜놓고 바닥에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긴 밤을 보냈다. 전화번호부를 펼쳐보다가 언젠가 시내 본(Bon)백화점 부근에서 봤던 여행사 이름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고 전화를 해봤다. 내일 아침 8시 정각에 고향으로 출발하는 버스 편이 한대 있다고 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승차권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12,000원이라고 다. 바가지 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탈래 말래 하는 급박한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예약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버스는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출발하였다. 좌석을 최대한 채워보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몇 군데 좌석이 남아 있는데도 자리 때문에 큰소리로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옆에서는 그 사람을 쳐다보며 소란스럽게 한다고 또 시비를 거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탄 승객들의 눈치를 살피며 한 사람이라도 더 오기를 기다리느라 운전기사는 10분, 20분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시동을 걸고 서서히 출발한 귀성 관광버스는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다.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달린 게 아니라 거의 기어가듯 한 버스는 얼추 9시간 만에 순천에 도착하였다. 순천에서 다시 벌교행 시내버스로 갈아탔다. 25분 만에 벌교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휴~~~! 우리 동네 원당굴까지 4km 더 가야 할 길이 남았지만, 거의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기분에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터미널 옆 공중전화 박스 앞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도착했다고 어머니께 전화를 할까 생각했지만, 몸도 피곤하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냥 단념하고 말았다. 가게에서 배 한 상자를 택시에 싣고 원당굴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들고 있었다. 정중히 두루 인사를 드리고 방에 들어갔다. 안양에서 출발한 지 꼭 10시간 만이었다.  내가 마을회관 앞도착할 때 아버지는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물었다. "어서 온나... 너 혼자만 오는 거냐?" 아버지 옆에 나란히  있던 셋째와 넷째 그리고 막냇동생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나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 원래 몸이 허약한 걸 어떡해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얼버무렸다. 지켜보고 있던 동생들도 살며시 내 곁으로 다가와 정말이냐, 왜 그런 거냐, 무슨 일 있었냐며 걱정스럽게 다시 물어보았다. 이런 나의 몰골을 보고 다들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 쓰린 가슴을 참기가 어려웠다. 둘째는 제수씨와 함께 어제 왔다가 오늘 오후에 처가로 이미 떠나고 없었다. 얼굴을 못 봐 섭섭했지만, 때마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주는 제수씨의 마음씨가 유달리 고맙게 느껴졌다. 저녁밥을 먹기 위해 예전과 다름없이 정재방에 어머니가 걸게 차린 밥상에 둘러앉았다. 공기가 좀 싸늘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방안 가득 감돌았다. 기다렸던 며느리가 오지 않아 생긴 빈자리와 허탈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큰형수가 오리라며 기다리던 동생들 표정도 굳어져 있었다. 말은 안 해도 듣고만 있던 엄마의 실망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나는 동생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없이 미안한 생각뿐이었다. "한 번 밥상을 차렸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말고 함께 식사하시죠." 넷째가 침묵을 깨며 엄마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머니 혼자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불편하고 안쓰러웠을 것이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온 식구가 한 데 모여 밥상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식사하는 기분 좋은 장면을 누구나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바로 그 한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길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겉치레 밖에 안 되는 선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서로 얼굴 보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동생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내외와 할아버지 내외분을 모신 당산 옆 선산 묘역. 계단식 석축이 가미돼 새롭게 단장된 모양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봄부터 추석 전까지 아버지가 전력을 다해 시행한 대규모 개선 사업이었다. 나는 성묘를 하고 돌아온  소감을 상기된 표정으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할아버지 묘역 정비가 정말 잘 됐던데요. 산소에 절을 할 때마다 뭔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 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했어요. 아버지, 정말 훌륭하고 큰일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들으시고 아버지는 묘역 정비사업이 완료되기까지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버지 눈가에 소리 없이 눈물이 히고 있었다. 내 가슴이 철렁하고 당황스러웠다. 필시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연이 깔려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정말 큰 일 하셨어요!"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위로해드렸다. 묘역 정비에 들어간 비용은 아버지가 마을 앞산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조달하였다. 지난 4월 7일 묘비 제막식을 가진 이래 이번 9월 초 완성에 이르기까지 공사는 약 5개월간이나 계속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감독하는 사람도 없이 업자에게만 일임하는 방식으로 맡겨놓다시피 하다 보니 이래저래 비용도 훨씬 들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산을 판 돈이 거의 다 들어가 버린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기도 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그토록 힘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살면서 처음 봤다고 다. 막상 일을 끝내놓고보니 아버지는 이제야 비로소 할 일을 했다는 남다른 감회에 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매일 학교에 출퇴근하면서 그날그날 작업을 지시하고  확인하는 등 거의 혼자 하다시피 진행한 일이라 그동안 너무나 들었다. 형제는 많았으나, 아무도 나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건 동생들(나의 삼촌들)이 당연히 맡아줘야 할 일이었다. 현장에서 작업도 돕고 감독도 해야 일을 야무지게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삼촌들은 오히려 약속이나 한 듯 마치 남의 일인 양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로만 일관하였다. 거금을 들여 추진하는 사업을 단단히 챙기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아버지 마음은 날마다 타들어가기만 했다. 아무런 협조도 하지 않고 뒤돌아선 동생들의 태도가 못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온순하고 마음 약한 아버지는 동생들이 스스로 나서서 힘을 보탤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중차대한 일을 곡절 끝에 혼자서 해내고 보니 장남이고 장손이며 장형인 아버지는 너무나 힘이 들고 서글펐던 것이다. 그런 심정 털어놓고 말을 나눌만한 사람 누가 있겠는가. 큰 형님인 아버지는 늘 그렇게 고독하고 외로웠다. 다만, 가끔 샘터 옆 먼 인척 어른을 찾아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울기도 한 일이 있었다. 알고 보니 여러 번이었다. 한편, 삼촌들이 한 패가 돼 장형인 아버지를 왕따 시키듯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매각한 앞산은 작고한 할아버지가 사놓은 재산이니 처분한 돈을 골고루 나눠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일정이 자꾸 길어지는 묘역 정비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이 최종적으로 얼마가 될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로 인하여 아버지는 몹시 마음 상했고 호소할 곳 없는 고립무원 지경이 되다. 어느 날, 정재방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어머니는 형제들끼리 모인 안방에서 고함을 지르며 다투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동생들이 합세해 아버지에게 산 판 돈을 나눠달라고 응얼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집단 반발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 마당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상황과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공세를 펴는 동생들이 못마땅하고 섭섭했지만, 오로지 혼자만 속으로 삭이고 또 삭였다. 타고난 성품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퇴근길에 술을 잔뜩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일이 잘 되고 동생들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면 차라리 일찍 귀가해 형제들끼리 같이 밥을 먹으며 술 한잔씩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황은 반전될 기미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형제간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버려 서로간에 마음을 나눌 공간은 더 이상 없었다.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은 곧 어머니의 불평과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이어졌다. 갈수록 서로 다투고 싸우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는 마음 약한 아버지가 몹시도 원망스럽고 불만이었을 것이다. 가슴이 타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술로 고주망태가 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불만을 털어내고 화풀이하는 상대는 엄마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처럼 일그러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엄마에게 증오할 만큼 미운 짓으로 비치기 시작하였다. 갈수록 심해졌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괴로운 심정을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단정한 것만 같았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한평생 쌓아온 정을 떼는 단계까지 빠져드는 불길한 징후였는지도 모른다.ㅠㅠ.)



 

   아버지는 과묵하지만 정이 많고 인자한 성품을 타고났다. 법 없이도 살 만큼 성실하고 정직했다. 7남매의 장남으로서 동생들에게 아버지 역할까지 짊어지고 뒷바라지를 다했다. 35년 동안 교직에 계시면서 농사를 소홀히 하지 않고 동시에 경영하는 등 의욕과 책임감이 아주 강했다. 집에서 좀 먼 곳으로 발령이 나면, 어떻게든 가까운 학교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승진을 포기하더라도 농사가 염려돼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경제에서 아버지는 늘 유지하고 지키는 일에 몰두하였다. 반면, 동생들은 하나같이 얻어내는 쪽에 신경을 쓰는 편이어서 은연중 염탐과 감시가 교차하는 신경전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물 속에는 동생들(나의 삼촌들) 대한 실망과 그로 인한 고통과 슬픔이 진하게 녹아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결혼한 자식이 명절날 기대에 어긋나게 혼자서 오니 그 모양을 보고 오히려 짠한 마음이 더해졌는지도 모른다. 나의 잘못과 죄책감도 컸다. 그럼에도 나는 동생들과 한 목소리로 이제는 큰 업적을 쌓았으니 건강하고 멋지게 사시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제 차례가 된 셋째의 결혼을 독려하였고, 심지어는 넷째의 결혼문제까지 거론하며 왠지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아버지 회갑 때에는 넷째 며느리가 꼭 참석하도록 하겠노라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아들들 빨리 장가보내는 것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책임감이 묻어나는 말로 들렸다. "마음껏 먹고 춤추고 노래하거라!" 아버지가 비록 술기운에 하는 말이지만, 자식들만큼은 꼭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진심이었다. 어쩌면 형제간에 하지 못했던 우애와 사랑이 너무나 아쉬웠기에 너네들끼리는 그러지 말라는 뜻이었다.  당부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연휴 마지막 날인 15일 오전, 동강면 신정리 외가를 방문하였다. 어젯밤까지도 같이 가기로 했던 엄마는 갑자기 피곤하다며 그냥 집에 있겠다고 했다. 말은 안 해도 그 원인이 나에게 있는 듯해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못내 아쉽고 섭섭할지언정 자식에게는 혹시라도 상처가 될까 봐 직접 할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혼자 속으로만 삭였다.ㅠㅠ. 외가에는 외삼촌들 두 분만 왔고, 외숙모 한 분이 열심히 음식을 차리고 계셨다. 푸짐하게 장만한 음식들이 상에 올랐다. "외가에 오니 추석 지내는 것 같네." 내 말에 한바탕 웃음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처가를 오랜만에 찾은 아버지는 오늘도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셋째와 막내는 우산을 받쳐 든 채 신작로 옆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갔다. 걸어오는 동안 옷은 대부분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시 벌교 터미널로 와서 나는 혼자 서울로 출발하고, 아버지와 동생들은 원당굴 집으로 돌아갔다. 암표 고속버스 티켓을 사 들고 오후 6시에 탄 버스가 다음날 0시 30분경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고향 먼 길을 다녀오면서 생각이 복잡하였다. 성묘하고, 온 식구 한 데 모여 같이 밥 먹던 일, 그리고 외가까지 다녀온 일들을 생각하면 좋았지만, 추석날 저녁 아버지가 흘린 눈물로 인하여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하였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는 나에게 집에 온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 그리고 당신의 손자(내 아들) 선물값이라며 3만 원을 봉투에 넣어 주셨다. 아버지는 눈에 아른거리는 며느리와 손자에 대한 사랑을 약소하지만 그렇게 표시하였다. 생각해보면, 오 형제 자식들이 모두 객지로 나가 뿔뿔이 흩어져 살다 한 데 모인 그 자리가 부모님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귀하고 행복자리였다.

숙제로 시작한 일기가 내 삶의 발자취로 남았다.

추석을 쇠고 채 두 달도 안 된 1989년 11월 1일 저녁 7시경, 난 데 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가신지 벌써 33년, 눈물은 메말랐으나 살아있는 한 지울 수 없는 슬픈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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