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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Mar 13. 2022

빛바랜 사모곡

나의 참회 일기 : 1993년 3월 9일 화요일

   지난 5일, 광주에 출장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고향에 갔다. 혼자 계시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가면 잠시나마 마음의 휴식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벌교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공중전화박스로 가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벌교 왔어." 다시 순환버스를 타고 더 가야 하지만, 벌교에 도착하였으니 이제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기별이었다. "그러냐? 얼러 온나. 조심해 와~" 객지에 나가 사는 아들이 찾아온다는 소식은 언제나 엄마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오 형제 중 누가 와도 그랬다. 집에 온다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온종일 집과 마을회관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가며 버스정류장 쪽을 바라본다. 마루 앞 토방에저 멀리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 쪽을 빤히 쳐다보거나, 마을회관 앞으로 나가 구정굴 모퉁이에 버스가 머리를 내밀고 나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 마침내 도착해 "엄마~!!!" 하고 부둥켜안으며 인사하면 울 엄마의 기다림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기쁨과 안도의 한숨 뒤로 서서히 사그라든다. 오후 5시 반쯤이었다. 나의 전화를 받고 미리 마을 앞에 마중 나온 엄마는 그 사이 논두렁에서 약간의 쑥을 캐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버스에서 내려 서서히 마을로 들어오는 나를 발견한 엄마가 쑥 바구니를 옆에 끼고 잰걸음으로 다가와 반가이 맞아주었다. 나는 엄마의 허리를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 안으며 포옹으로 인사를 했다. 해는 서쪽 하늘에 기울어져 아직도 제법 여유 있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씩 불었다.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완전 무공해나 다름없는 공기가 코끝을 스치며 신선한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동네는 더없이 깨끗하고 평화로웠다. 아직 일터에서 한창 일할 시간인지라 우리 집에 들어갈 때까지 길목에서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방 겸 식당으로 쓰는 정재방 바닥에 앉아 엄마가 깎아주는 과일을 먹으며 그간 별고 없었는지 근황을 살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살짝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내다봤더니 아랫집 아주머니가 딸기와 상추를 바구니에 담아 마루에 살며시 얹어놓고는 도망가듯 대문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예말이요!" 엄마가 큰소리로 불렀다. 아주머니는 다시 대문 앞으로 다가와 엄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들이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았다며 아들 주라고 조금 갖고 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얼마 안돼~" 하고 말하고서는 이내 돌아서서 바삐 사라졌다.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나를 보고 가져다주셨다니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 인심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엄마가 저녁을 짓는 동안, 근처에 각각 따로 사는 작은아버지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30분 남짓 만에 집으로 돌아와 막 대문을 들어서던 참이었다. 엄마가 대문 옆 돌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심하게 기침을 하며 토하고 있었다. 순간 겁이 나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걱정을 하며 침착하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왜 그래?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아...?" 엄마는 토하느라 약간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괜찮다고 안심시키려 했다. 아침에 밥을 잘못 먹어서 체한 것 같다고만 했다. 엄마는 그 후로도 구토를 한두 번 더 했다. 그러고 나서 큰방으로 들어가 두꺼운 이불을 깊숙이 덮어쓰고는 가만히 누워계셨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주 춥고 등이 시리다고 했다. '이거 어떡해야 하나. 울 엄마가 왜 이렇게 약해졌지...?' 어쩔 줄 몰라 혼자 고민하는 사이에 엄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걸 한테 안 보이려고 했는데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엄마,  아무래도 읍내에 가서 병원이든지 약국이든지 찾아서 진찰을 좀 받아보자니까...!" "괜찮아. 아침밥 때문에 체해서 그런  같다. 전에도 가끔 그랬단 말다. 예전에 내가 이러면 너희 아버지는 내가 꾀병하는 줄로만 알았다." "뭐, 전에도...??" 엄마는 무심했던 생전의 아버지 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때는 그래서 더 힘들고 외로웠지만,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어 혼자만 집에 있으니 그립고 생각이 난다는 말로 내게 와닿았다.



 

   나는 마음이 무척 무겁고 우울했다. 이렇게 잠시 동안의 고통도 다행히 밤 사이에 잠잠해지면, 나는 또 직장 때문에 가야 하는 처지가 서글프고 괴로웠다. '아무도 없는데 엄마가 또다시 토하고 아프면 어떡하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진즉 한 집에 같이 모시고 사는 게 답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지금까지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만 다. 엄마는 혼자 괴로워하는 아들을 지켜보기가 안타까운 나머지 오히려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차라리 당신 혼자 사는 것이 신간 편하다며 엄마 걱정은 절대 하지 말고 늬들 식구끼리나 잘 살아라고 했다. 체념 같은 엄마의 말이 귓전에 울리며 긴 여운으로 남았다. 매일 아침이면, 넷째가 안부전화를 걸어온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모시고 같이 살지 못하고, 자주 찾지도 못하는 처지라 형제들이 무시로 문안전화드리는 일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 결과다. 그러나, 자식들이 백 번 전화를 한들 엄마가 실토하듯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줄을 누가 알겠는가. 행여나 소식 듣고 놀랄까 봐 엄마는 자식들이 전화를 해도 일체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들은 다 그런다고 하지만,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엄마는 작년 말 나의 딸이 심한 감기로 인하여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서울 우리 집에 와서 며칠 묵고 간 일을 꺼냈다. "오늘같이 내가 이렇게 혼자 있다가 토하고 그러면, 한편 서럽기도 하지만, 지난번 겨울 너의 집에 있을 때는 그래도 우리 큰아들 옆에서 잠을 자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하더라. 그런 상태라면, 나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 그랬구나! 엄마는 여태 혼자 살면서 그토록 외롭고 두려웠지만, 그런 마음을 차마 아들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구나. 허약해진 엄마의 심정을 미리 헤아리고 챙겼어야 하는 건데 그저 내 작은 식구만 생각하며 무심하게 살아온 것이다. 엄마는 큰아들이, 그게 정 아니면 다른 자식이라도 나서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그런 자식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인정하고 혀를 찼는지 또한 알 길이 없다. 실낱 같은 기대 속에 한동안 자식을 바라보며 품었던 바람은 그토록 허망하게 시들어버렸나 보다. 그냥 가슴 깊은 곳에 묻는 수밖에 달리 또 무슨 몸짓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 자체가 무척 힘들고 서러웠을 것 같다.ㅠㅠ. 엄마가 오늘에야 큰아들인 나에게 그런 심경을 털어놓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간 홀로 견디기 힘들었던 점도 있지만, 오늘 이 자리는 동생들도 없고, 며느리들도 없는 편안한 기회였기에 마음을 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식들에게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비장한 선언 같기도 했다.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 한 동안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같이 살자고 해야 하는데 용기 있게 그 말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을 속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집을 힐끗 한 번 쳐다보았다. 엄마가 이 큰 집을 지키며 혼자서 살아온 날을 꼽아보니 벌써 4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 엄마가 나에게 들려주는 말은 절규나 다름이 없었다. 와락 가슴에 날아와 사무쳐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엄마, 나도 무척 인내하고 있어. 내 집이 아니니까. 이제 여름에 새집 입주하면 그때 우리 같이 살도록 해. 같이 사는 것이 때론 괴롭고 섭섭할지라도, 사람 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냐며 용서하고 인내하며 살면 되지 뭐..." 나는 마음과 같이 편하게 모실 자신감이 없는 흐리멍텅한 말을 하고 말았다.

 



   엄마는 이제 시골도 사는 사람이 많이 줄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낮에는 모두 일터에 나가버리고 집집마다 텅 비어있는 상태라 아주 적막할 정도라는 것이다. 밤에 남의 집에 놀러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런 것도 눈치 보이고 염치가 없어 자주는 못 간다고 했다. 심지어는 몇 명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지만, 사소한 일로 입장 곤란하게 만드는 좋지 않은 풍토가 일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로서는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들이다. 혼자 사는 사람의 명의를 빌려 영농자금 대출이나 보험 약관대출을 하는 사례도 있는 등 과거의 순박하고 조용했던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진등산 매도 당시 이 아무개 밭이 아버지 명의로 함께 매도되어 이의가 제기돼 있다거나, 4년 전 정산 완료한 경지정리 지원 부담금 납부 독촉장이 날아왔다는 등 우리 집에도 머리 아픈 일들이 생겼다며 엄마가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내막인지 전화로 차근차근 알아봤더니 모두 얼토당토않은 찔러보기식 종이 쪽에 불과한 일들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연로한 엄마 홀로 사는 사정을 틈타 누군가 사기성 농간의 기회를 노리는 게 아닌지 불쾌한 생각마저 들었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일들이라 경계심이 생기고 안타까웠다. 격세지감이다. 그동안 집안의 재산관리나 농사일을 아버지가 전담해왔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참 자유롭게 살아왔다. 아는 바도 없거니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촌놈이 촌놈답지 못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내 자식 귀하게 키우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음을 나는 잘 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재는 그런 점에서 나에게 여러모로 당혹스러운 현실로 다가왔다. 사태를 잘 파악하고 꼼꼼하게 챙겼어야 하는데 엄연한 엄마의 존재에 기대어 변함없이 방관만 하고 있었다. 이번에 엄마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자리를 온전히 이어받는 기회를 그때서야 비로소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엄마를 혼자 집에 남겨두고 다시 서울로 떠나던 날 3월 6일, 토요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엄마는 빈 손으로 보내기 섭섭하다며 마을에서 싱싱한 딸기 한 상자를 장만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집에 가져가서 며느리와 손자, 손녀랑 맛있게 먹으라며 챙겨준 선물이었다. 엄마는 도로변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와 버스가 오기를 같이 기다려주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내가 올라탄 후 다시 기계음을 크게 내며 떠날 때 나는 창밖으로 엄마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다 곧 집으로 갔다. 밤 9시 30분경, 나는 서울에 도착하였다. 엄마한테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혼자 계실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겁고 우울하기만 했다.


(1993. 3. 9. 화요일. 자정)


   일기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내가 풀지 못한 아픈 숙제의 기록이다. 그 사이 근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아프고 서럽게 흘러갔다. 그때의 일기를 뼈대로 삼아 그간의 복잡했던 심경과 오늘의 생각을 가미해 글을 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줄곧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쓰고 보니 치부를 드러내듯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완고하게 새기고자 한 까닭은 끝까지 잘하자는 다짐 하나, 그리고 채찍으로 삼기 위함이다.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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