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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un 07. 2022

진도에서 엄마와 함께 2박 3일

오 형제가 마련한 엄마 생애 최고의 생일잔치

   딸 하나 없이 아들만 오 형제인 우리는 어느새 평균  나이  60세가 되었다. 햐~~~, 유수같이 흘러간 세월이 놀랍기만 하다. 벌써 33년 전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먼저 보낸 어머니는 오늘도 우리의 탯줄 같은 집을 홀로 지키 고향에 외롭게 계신다.  옛날, 3대가 한 집에 사는 대가족 집안에 아무런 세상 물정도 모르고 10대의 나이로 시집 온 맏며느리였다. 그래도 고진감래(苦盡甘來)를 꿈꾸며 숙명처럼 짊어진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의 건사에 혼신을 다해왔건만, 어느덧 많던 식구들은 자식들까지 죄다 객지로 떠나혼자만 휑하니  자리에 남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는 결국 이렇게 혼자 남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래였다. 생각할수록 삶이 허망하고 수수께끼 같기만 하. 이렇게 된 세태가 아프고 안타깝고 하다. 그렇지만, 평생 인내와 긍정의 화신처럼 살아온 울 엄마는 차라리 그 집이 세상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신간 편한' 안식처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그럴 리가 없는 속 깊은 심정을 우리는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의 아픈 선택에 안도하며 감사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자식으로서  뻔뻔하면서도 염치없는 행동이었지만 감내해야 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자지간에 묵시적으로 이루어진 쓰리고 안타까운 타협이나 다름이 없었다. 엄마는 스스로 시골에 남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남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

 



   그런데 이를 어쩌나. 무심한 세월 속에 울 엄마 연세가 어느새 8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비교적 건강하고 정정한 편이어서 다행이지만, 연령의 중량감이 차츰 더해짐에 따라 나와 동생들의 염려와 긴장감은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오 형제는 밤낮없이 무순으로 엄마한테 전화를 하며 별일 없는지 안부를 살피는 등 바짝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 엊그제는 엄마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막내가 오 형제 단톡방에 짤막하게 글을 올리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한참 후에야 연결이 돼 물어봤더니 엄마는 전화기를 큰방에 놔두고 부엌에서 일하느라 벨이 울리는 줄도 몰랐다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종종 있는 일이다. 낮에 전화를  엄마는 마을회관에서 받는 날이 많다. 마을 사람들은 오전 10시나 11시경 광장이나 다름없는 회관으로 나와 함께 어울려 담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점심때가 되면 거기서 자주 밥을 지어 나눠 먹기도 한다. 쌀은 매년 동답(洞畓)을 경작하여 수확한 공동자산도 있지만, 군청과 읍사무소가 복지정책으로  마을마다 제공해주는 식량 . 마을회관은 보통 할머니 그룹이나 다름없는 여자들 차지다.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자들은 밀려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석양에 해가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질 즈음이면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마을은 짙은 어둠과 적막 속에 잠긴다. 울 엄마도 집에 가식당 방에 똑딱 불을 켜고 큼직한 냉장고 문을 연다. 오래된 밑반찬과 음료수들로 가득한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보다 식탁에 금방 상을 차린다. 때로는 손자 손녀가 보내준 곰탕이나 설렁탕 파우치를 꺼내 데워서 뚝딱 한 끼를 해결하기도 한다. 시골은 지금 울 엄마처럼 집집마다 노인 혼자 사는 1인 가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매일 회관에 나가서 서로 얼굴을 보며 지내는 것은 오늘날 노인복지 차원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서로서로 말벗하며 외로움과 시름달래줄 뿐만 아니라, 안부도 챙기는 돌봄 효과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마을공동체인가!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재촌 재가복지'의 진수다. 멀리 있는 친척은 이웃만 못하다는 노랫말처럼 부모 곁을 지키지 못하는 자식보다 엄마와 같이 지내는 마을 사람들이 곁에서 더 나은 역할을 해주고 있는 셈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것이 사실 오래전 이도 저도 못하다 이심전심 타협한 하나의 근거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고향에 의존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걱정이다.




   예전부터 엄마는 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1960년대에 마을 앞 신작로는 자갈밭길 비포장 도로였다. 엄마가 버스를 타고 10리 길 읍내 시장에 갈 때면 일부러 맨 뒷자리에 즐겨 앉았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가는 동안 버스가 찌울둥짜울둥 흔들리는 맛을 가장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엄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 때마다 우리가 고향으로 내려가는 대신 몸소 서울로 역귀성을 하였다. 엄마 연세가 80을 넘기면서부터는 건강과 체력이 염려돼 그냥 고향에 계시라 하고 대신 우리가 내려가기로 역할을 바꿨다. 며느리들은 빼고 형제들만 가기로 한 결정이었다. 사정상 못 가는 동생도 있지만 우리는 가급적 다 같이 움직이기로 하였다. 우리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었지만, 엄마의 반응을 보고 그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금방 인정해야 했다. 자식들이 찾아오는 것이야 반가운 일이지만, 며느리들을 쏙 빼고 온다면 그것은 결국 자식들 밥을 엄마가 손수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는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우리는 엄마가 일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일정계획을 수정해서 같이 움직이기로 하였다.

 



   지난 음력 3월 17일, 엄마 생신을 맞아 남녘 땅끝 진도에 가서 기념비적인 행사를 갖기로 하였다. 과거에도 우리는 엄마 생일을 그렇게 외지에서 여러 번 치렀다. 그때마다 승합차 카니발 한대를 렌트해서 다녔다. 엄마는 자식들과 함께 유람하듯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는 흡족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그때마다 커다란 기쁨과 행복감을 즐겼다. 지금까지 그렇게 방문했던 곳이 여수 오동도, 보성 율포, 장흥 우드랜드와 탐진강, 강진 영랑 생가와 다산초당, 그리고 고려청자 도요지, 해남 대흥사, 목포 유달산과 민어 거리, 경남 남해 등등 주로 집과 가까운 남해안 여러 곳이다. 생일을 치를 때마다 그때가 울 엄마 생애 최고의 시간이 되도록 우리는 미리 중지를 모아 왔다. 금번 진도 여행 역시 엄마한테 최고의 추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상당한 시간을 갖고 준비하였다. 일찌기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이 이르기를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가 같이 보는 것이라(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여손) 했는데 우리집에 아직 손자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이번에도 카니발 승합차를 렌트하여 일단 고향 벌교로 내려갔다. 엄마가 혼자 일구다 만 텃밭 일을 동생들이 마저 마무리하고 곧 진도로 출발하였다. 


   모두가 처음 가는 길이었다. 두 시간 남짓 운전 끝에 바로 아래 남해 바다가 넘실거리는 이국풍의 멋진 콘도에 닿았다. 입지와 풍경과 시설이 환상적이었다. 첫날 초저녁에 서둘러 찾아가 본 세방낙조는 아름다웠다. 우리는 엄마 주변에 반원 모양으로 둘러서서 붉은 해가 바다에 잠길 때까지 낙조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다음날 운림산방에 갔을 때 엄마는 다리에 힘이 없다며 같이 구경하기를 포기하고 막내와 같이 차에 남아 휴식을 취했다. 미술관연못을 중심으로 잘 조성된 정원 조경을 함께 구경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행선지 이동 중 우연히 가수 송가인의 집을 발견하고 들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엄마가 KBS 가요무대 애청자여서 더욱 반가워하였다. 우리 일행은 때마침 집에 계시던 그녀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점심을 기 위해 맛집으로 소문난 '뜸북이 식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집은 여자 둘(주방), 남자 하나(홀), 그렇게 어르신들 세 분이 경영하는 식당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채소를 손수 일구는 마당 옆 텃밭
진도의 세방낙조를 바라보는 울 엄마




   나는 엄마의 생신을 축하하자며 진도산 막걸리를 한잔씩 따르고 동생들에게 건배 제의를 하였다. "우리 엄마 생신을 축하하고, 만수무강을 위하여!" 우리 오 형제는 큰 소리로 '위하여'를 외치고 일제히 잔을 비웠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엄마에게 한 말씀하시라고 권해드렸다. 그런데,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염치가 없다. 미안하구나...!" 엄마는 낮으막한 목소리로 전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순간 나는 마음이 울컥했다. "아니, 엄마, 이렇게 좋은 날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래~ㅠ.ㅠ" 울 엄마가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을까. 순간 좌중이 숙연해졌다. 우리 모두는 잠시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원망하듯(?)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일부러 다른 말을 이어가며 분위기를 바꾸고자 애를 썼다.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내 속으로는 큰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만 빼면, 2박 3일 진도 나들이 일정을 마치고 고향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엄마 얼굴은 시종 행복한 표정이었다. "느그들하고 한 차에 같이 타고 유람하며 다닌께 좋구나!" 아직 현역인 막내만 빼고 모두가 재취업해 일을 하는 처지인지라 우리는 엄마를 고향 집에 모셔다 드리고 금방 자리를 떠야 했다. 퇴직하고도 여유를 갖지 못하고 돈에 쪼들리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서글프고 답답하였다. 엄마를 온전히 모시지 못하고 고민만 하며 세월을 보내는 쓰린 사정이기도 하다. 엄마는 어느새 마을 앞 정자에 모여있는 동네 사람들 틈 사이에 섞여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자 하니 바로 엊그제 안동 떡(宅)이 세상을 떠나 장사를 치르고 거기에 모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르신들께 두루 작별인사를 하였다. "자네들이 효자들이네." 작고한 할머니 조카라는 송 영감이 나의 손을 붙잡고 칭찬의 말씀을 해주셨다. 넷째는 엄마한테 다가가 두 팔로 감싸 꼭 안아주며 인사를 하고 차에 탔다. 우리는 천천히 동구 밖으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낮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회관과 정자




   자식 다섯이 일시에 함께 몰려왔다가 다시 한꺼번에 휙 가버리면 그때마다 엄마는 꼭 마음이 이상하다고 말하곤 했다. 혼자 남아 있으니 외롭고 울적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에도 그럴까 봐 늦은 밤 전화를 했다. 두서없이 조단조단 30분 이상 주고받으며 나는 주로 엄마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동갑 쟁이 동네 친구들이 셋 - 봉강 떡, 수반 떡, 안동 떡 - 있는데 하나 둘 세상을 떠나니 기분이 이상하다며 또다시 마음 약한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엄마,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엄마는 항상 밝은 생각하고 긍정하며 사니까 달라요. 건강하니까 앞으로도 오래 사실 거예요. 엄마, 그 옛날 고생한 것 생각하면 지금 행복하지 않아?" 엄마는 내 말을 듣고서는 빙긋 웃었다. "그렇기는 허다^^"




   현역으로 일하던 10여 년 전, 고향에서 홀몸으로 외롭게 사는 엄마를 직접 모시며 살아보고자 일부러 지방근무를 자청한 적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엄마랑 단둘이 살며 출퇴근한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엄마도 기뻐하며 얼굴에 화색이 돌고 즐겁게 밥을 지어 주셨다. 출근할 때 마을 앞에 나와서 멀어져 가는 나를 지켜보고, 퇴근시간이 되면 다시 나와서 신작로를 바라보며 내 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아들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엄마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비록 1년으로 끝난 짧은 기회였지만, 지금 돌아봐도 백번 잘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 어쩌다 되뇌는 공자의 말씀이 생각을 실행하게 한 좋은 자극제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훗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길이라는 바로 그 생각.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往而不來者年也(왕이불래자년야)

去而不見者親也(거이불견자친야)


나무는 흔들리지 않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뒤늦게야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양친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버리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세월이요,

떠나가면 두 번 다시 만나 뵐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이다.




   엄마는 우리 오 형제 삶의 등불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정신적 지주다. 마음 약해지지 마시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항상 밝게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교훈적인 공자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엄마를 생각한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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