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노인복지주택으로 이사하는 날. 이른 아침부터 짐을 싸기 시작해 서둘렀지만 정오가 지나서야 전입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탑차를 1층 현관 앞에 대고 점심부터 해결한 후 짐 내리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집 열쇠. 관리사무소에 갔다. 카운터에 앉은 직원이 일어서더니 반기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였다. 첫인상을 보니 서비스가 별로일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그 사람 앞에 다가섰다. ”수고 많아요. 집 열쇠 받으러 왔어요 “. 내 말을 들은 그 직원은 열쇠를 내주기에 앞서 자기 일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몇 동 몇 호죠? 성함은요? “. 그는 전입 주택을 확인한 후 관련 서류들을 보며 하나씩 체크를 하였다. ”엘리베이터 사용 예약, 관리비 예치금도 입금하셨네요! 그럼 됐고요. 이거 받으시고 동의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 그는 커버에 ‘노인복지주택 운영규정’이라고 적힌 책자를 나에게 건네며 맨 마지막 쪽에 붙어있는 동의서 양식에 서명하라고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다. ‘관리규약이 아니고 운영규정이라니...’ 여태까지 아파트에 살면서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규정이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사인을 해주고 돌아와 이삿짐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누가 이사하는 날 한가하게 그런 걸 따지고 있겠는가. 창구직원은 내가 서명한 동의서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리고 이미 받아놓은 동의서 파일에 차곡차곡 쌓듯 나의 동의서를 얹으며 정리하였다.
”당신은 입주자가 아니고 입소자입니다. “
이사 후, 단지 내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입소자’라는 말과 게시판에 붙여놓은 시청 노인복지과 공문이었다. 입소자. 왜 입주자라고 하지 않고 입소자라고 하는 것일까. 감옥에 들어온 죄수도 아니고 요양원에 들어온 환자도 아닌 멀쩡한 사람들인데 말이다. 치열한 분양 경쟁을 뚫고 입주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매우 불쾌했다. 불편사항이나 궁금한 사항이 있어 찾아가는 곳 앞에도 버젓이 ‘입소지원센터’라고 붉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쓴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아파트와 다름없다고 봐서 너무나 당연한 생각을 한 때문일까. 그 안내판을 여러 번 봤는데도 그때마다 나는 ‘입주지원센터’로 읽고 다녔지 뭔가. 입소지원센터 직원들은 입주민들의 잘못된 용어 사용을 일일이 고쳐주고 있었다. ”여기 노인복지주택은 아파트가 아니고요, 노유자시설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시설에 들어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입주하시는 게 아니고 입소하시는 거예요! “. 그러니 입주민이 아니고 입소민이라는 것이다. 지원센터 직원들은 마치 여기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파트 입주자가 아니라 ‘시설 입소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명확히 주입하겠다는 목적의식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시설 입소자! 시설 입소자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입소 또는 입소민이라고 말하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같이 입주 또는 입주민이라고 항변하고 주장하듯 말하였다. 나 역시 입소민이라는 용어를 인정하지 않고 입주민이라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입주민들과 지원센터 직원들 사이에 감정적 괴리가 생겼고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어차피 폭발할 갈등의 불씨가 주고받는 말에서부터 일찌감치 그 기미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복지주택 입주자들 감시, 감독에 열중하는 관청
노인복지주택을 관장하는 시청 노인복지과에서도 제한적이긴 하나 감독과 감시가 심했다. 관할 동사무소에서도 이에 가세하여 불법입주를 단속하고 있다고 공지했다. 시청에서는 입소자격에 관한 법률 규정을 포함한 공문서를 관리사무소 협조로 모든 게시판에 게시해놓았다. 60세 이상인 사람만 입소하는 것이 원칙이고,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그의 배우자나 19세 이하의 자녀 또는 손자녀가 함께 입소하는 경우에 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부적격자이니 입소하면 안 된다며, 적발 시에는 강제퇴거 등 강력한 행정조치를 할 것이라는 엄포까지 담아놓았다. 관할 동사무소에서도 각 세대에 입소자격자가 거주하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단속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시청 공문과 나란히 게시해두었다. 어느 날 통장이 나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노인복지주택이 있는 마을 통장입니다. 선생님, 60세 넘으셨죠? “. ”네, 그런데요... “. ”입주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 “. 그렇게 전화를 끊은 그 여자분은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 내가 사는 노인복지주택의 ‘입소민‘이었다. 자신이 입소민이면서 나에게는 ’ 입주‘를 축하한다고 하였다.
어이없는 규제, 간섭받는 소유권
아니, 분양 주택에 시청이 왜 이렇게 간섭하는 걸까. 분양받은 주택이지만 입소자들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복지혜택을 받게 되는 만큼 합당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목적과 취지가 당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설마 그렇더라도 개인에게 구분소유권을 이전하고도 복지혜택을 제공한다면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평소 알고 있던 상식과 사뭇 배치되는 현상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내가 사는 집, 분양형 노인복지주택에서 직접 목격하게 되다니. 소유권은 공공복리 등 특별히 법률로 정하는 사유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배타적 권리가 아니던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인의 사유재산인 주택의 사용과 처분 등에 관하여 이토록 제한과 규제를 가하는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반대로 정부 입장도 생각해봤다. 이러한 제한과 규제가 모두 엄연한 법률에 근거하고 있는데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가볍게 단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있어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관리사무소에서 동의서를 제출하고 받은 노인복지주택 운영규정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