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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Oct 17. 2020

준칙도 없이 제각각 정하는 운영규정

설치자 전횡의 도구가 되다

현장감독으로 등장한 설치자, 운영규정을 내밀다.

노란색 두꺼운 종이로 된 운영규정 커버 중간에는 노인복지주택단지 전경 조감도가 흑백사진으로 인쇄돼 있다. 그 사진 아래쪽에는 - 당신의 편안함을 위해 완성된 공간 - 광고 캡션 같은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 그래, 그 말처럼 정말 편안해야 하는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커버를 넘기고 한 장을 더 넘겨보았다. 유의사항과 당부의 말씀이 검은색 직사각형 박스(box) 안에 각각 기재된 모양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중 입소자격에 관한 법률 규정을 담은 유의사항은 섬뜩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당 노인주택에 입소하시는 귀하께서는 노인복지법 제33조의 2(노인복지주택의 입소자격등) 규정에 의한 입소자격자가 아닌 자에게 양도행위, 임대행위 등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법률이 금지하는 행위입니다. 이를 위반하는 경우 노인복지법령에 의하여 행정처분 및 사법기관에 고발조치 등 신분상, 재산상 피해가 발생될 수 있습니다.     


[노인복지법 제33조의 2(노인복지주택의 입소자격 등)]

노인복지주택에 입소할 수 있는 자는 60세 이상의 노인(이하 ’입소자격자‘라 한다)으로 한다.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입소자격자와 '함께' 입소할 수 있다.

1.입소자격자의 배우자

2.입소자격자가 부양을 책임지고 있는 19세 미만의 자녀, 손자녀”     



이 운영규정을 보는 순간, 국가(노인복지법을 관장하는 보건복지부)-시청(인허가 및 관리)-동사무소(주민등록 관리)-설치자(운영관리)로 이어지는 다중 감시, 감독의 매서운 눈초리들이 입주자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영규정을 들고 이처럼 나타난 설치자는 서비스 제공자라기보다는 입주자를 철저히 입소자로 보면서 군림하는 현장감독 같은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우리가 사는 노인복지주택의 운영규정 제1조(목적)는 노인복지주택의 관리 또는 사용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소유자 등의 공동이익을 증진하고 양호한 주거환경을 확보하는 데 있다고 돼있다. 기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내용과 실질은 입주민들의 정서와 그 괴리가 크. 관리비가 과다하지 않고 적정 수준이기를 바라는 것은 입주민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당연한 희망사항이다. 문제는 지금의 노인복지법령으로는 설치자가 입주민들의 기대에 부합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데에 있다. 법령이 그들이 말하는 입소자보다는 전적으로 설치자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입주 초기 설치자 주도로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관리비를 보는 시각과 관심사는 크게 엇갈린다. 설치자는 소유권이 없으니 물러가라고 입주민들이 제아무리 반발하더라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시설의 운영과 관리권을 이미 확보해 법적 기득권을 얻었고, 따라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밥상이 이미 차려졌으니 밥술만 뜨면 되는 것이다. 수익성을 노리는 기업의 생리 아니겠는가. 설치자의 관심이 젯밥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입주민들의 의구심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운영규정은 설치자가 노인복지주택의 운영관리 권한을 빌미로 삼아 언제까지나 수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전횡의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운영관리 문제를 둘러싼 입주민과 설치자 간의 주장과 시각차가 너무나 크다.




날림으로 얼렁뚱땅 확정하는 사업주체의 운영규정

노인복지주택을 관리하는 기준은 운영규정이다. 설치자는 그가 임명하는 시설의 장의 손을 빌려 거의 독자적으로 만들게 된. 입주민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중요한 기준인데도 그렇다. 따라서 사업주체가 입주 전에 제정한 규정은 입주민의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어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제대로 하자면 입주자들에게 규정의 내용을 일일이 배포하고 설명과 질의응답도 해야 한다. 그리고 찬반 투표로 결정하면 된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 그렇게 하는 입주단지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내용에 대한 시비를 최소화하고 사업주체나 설치자의 의사를 가장 쉽게 관철할 수 있는 묘안은 입주 시 집 열쇠를 받기 위해 관리사무소를 헐레벌떡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서둘러 동의서를 받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절호의 기회는 없다.      




준칙도 없이 만들어지는 노인복지주택 운영규정

이와 같은 입주시점을 활용한 일련의 확정 절차는 노인복지주택이나 공동주택이나 집합건물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노인복지주택 운영규정은 공동주택에 적용되는 관리규약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특수한 점이 있다. 법적 근거부터 다르다. 공동주택 관리규약은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라 시·도지사가 정한 준칙을 참조하여 입주자 등이 정하도록 하고 있다. 오피스텔 등 집합건물의 경우도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시·도지사가 표준규약을 마련하여 보급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공동주택도, 집합건물도 모두 법률에 따라 광역단체장이 표준 모델을 제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반면, 노인복지주택 운영규정은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라 작성하는 것으로 수요자가 편리하게 원용할 만한 그런 준칙 따위는 없다. 다만 시행규칙에 메모 형식으로 나열한 노인주거복지시설 운영기준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관리규약이나 표준규약의 제정 의무를 법률로 정하고 있다면, 운영규정은 법률이 아닌 시행규칙으로 운영규정에 포함하여야 할 사항 10가지 남짓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법률적 구속력과 관리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노인복지주택의 운영기준과 운영규정그만큼 체계적이지 못하고 허술한 것이다. 설치자의 의사만 과도하게 반영되고, 입주민들은 정해진대로 따르라는 식이니 환영받을 수 없다. 처음부터 불만과 분란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그런 점에서 노인복지주택 운영규정은 공동주택 관리규약이나 집합건물의 표준규약과는 달리 일관성이 없고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 설치자와 입주자 사이에 파열음이 끊이지 않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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