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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Dec 10. 2022

임금협상, 그 뜨거운 감자

알든말든 나만의 은밀한 심리전

   8년 전, 제주도로 이주한 홍 선배가 감귤 한 상자를 보내왔다. 매년 나에게 감귤 수확 소식을 전하는 방식이다. 반갑고 감사한 마음에 안부 전화를 하였다. 그리고 10 상자를 주문하였다. 노후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선배를 응원하는 뜻이기도 하지만, 값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어서 매년 선물용으로 산다. 올해는 내가 관리소장으로 일하는 단지의 동대표들에게도 한 상자씩 보내기로 하였다. 연말을 맞아 괜찮은 성의표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내년도 예산안 심의를 앞두고 있는 시점인지라 동대표들의 성향과 심리를 세심하게 살피며 관리하는 중이었다.




   10월이 되면, 관리소장은 금년에 일한 실적과 성과를 돌아보고, 내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안 수립 작업에 돌입한다. 늦어도 11월 말까지는 입주자대표회의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공동주택관리법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한 절차다. 게다가 금년은 동대표 임기 2년이 만료되는 해여서 차기 동대표와 임원을 선출하는 작업까지 겹쳐 11월은 어느 때보다 마음이 바빴다.




   직원들의 급여 인상안은 예산 항목 중 가장 뜨거운 감자다. 특히 지금 일하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는 연초 내가 부임할 당시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 수준으로 직원들이 심한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후일 어느 동대표가 나에게 말해준 일화를 듣고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들을 솎아낼 작정으로 대립하며 상당한 압박을 가했단다. 임금인상 작업도 진지한 검토와 토론은 커녕 즉흥적 기분에 휘말려 졸속으로 이뤄졌다고 했다. 속 깊은 전임 소장은 나에게 인계인수를 확실히 해주면서도 임금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갔다. 그렇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말 없이 털고 일어나 다른 데로 가서 더 좋은 대우받으면 그만이지. 내 눈에는 그것이 이직이 잦은 이 바닥의 상식 같은 직업관처럼 보였다.




   전임 소장이 퇴사한 지 얼마 안돼 사직서를 낸 기전과장이 솔직한 심경을 나에게 토로하였다. 그가 들려준 말은 금년 내내 나의 머릿속에 새겨지듯 남아있었다. 여기 급여 수준이 너무 낮으니 최소한 10%만 올려달라 했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월급이 주변 단지 기전과장들에 비하여 너무 적다고 했다. 그가 여기서 나가고 다시 채용공고를 내더라도 그 월급 보고 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단언하듯 비관적 전망까지 내놓고 퇴사하였다. 어차피 떠날 작정으로 작심하고 하는 말이지만, 나는 직원들이 그토록 봉급 타령을 하는 것이 좀 속물스럽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와서 다시 돌아보면, 그것은 내가 아직 그 세계의 물정을 잘 모르고 한 섣부른 생각이었다.



   

   사연이야 어떻든 빈자리는 채워지게 마련이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저마다 명분과 이유가 있다. 동대표들도 그런 점을 뻔히 안다는 듯 배짱을 부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다. 바로 이 동네가 그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나는 월급 좀 적게 받더라도 정말로 스트레스 덜 받고 퇴근 후 집에서 조용히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달 받는 약간의 연금이 있기에 그것으로 퉁치자는 생각이었다. 나를 선택한 동대표들은 아마도 알고 보니 왕건이를 건졌다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나만의 착각..ㅋ). 뒤를 이어 연달아 들어온 경리주임과 기전과장도 각각 그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이런 곳이라도 와야 했던 것이다. 거의 1년이 다돼가는 지금 생각하면, 다행히 능력 있고 인품 좋은 소장님 만나 즐겁게 일한다는 그들이지만...^^




   까칠한 동대표들을 설득하는 일은 내가 마땅히 건너가야 할 만만치 않은 숙제로 느껴졌다. 나는 부임할 당시부무엇보다 동대표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최선을 다해 응대해왔다. 그런 기회에 그들의 관심사와 요구사항을 파악해 처리해주고, 현안사항으로 떠오른 문제들을 미리 협의, 조정할 수도 있었다. 특별한 용무 없이 그냥 말동무해줄 사람을 찾아오는 연로한 대표에게도 고분고분 성의껏 응대하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예의 바르고 정성껏 대해주면 좋아한다. 게다가 신속하고 똑 부러지게 반응해주면 열광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평소 대화가 통하고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놓으면, 상호 간에 지나치게 야박하게 대접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다. 상대방이 귀하게 대접받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마음가짐은 1급 심리상담사인 나에게 이미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자질이기도 하였다.




   가장 먼저 주변의 세대수가 비슷한 단지들사례를 수집하던 경리 주임이 한숨을 쉬며 나를 보고 말했다. "아이고, 우리 소장님 월급이 제일 적네. 평균도 안돼요. 우리 단지가 유별나게 짜다는 게 여기서 확인이 되네요. 이거, 어쩌면 좋아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른 직원들보다 소장 월급을 가장 많이 올려줬으면 좋겠다고 살짝 동정심드러내기도 하였다.^^ 나는 별도로 과거 회의 자료철을 뒤적이며 연도별 임금인상 내역을 찾아보았다. 임금을 동결하거나, 10만 원씩 일률 인상, 혹은 3%대 인상이 대세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의 관례를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 은근히 긴장감느껴졌다. 관리소장들의 급여현황을 보도한 흥미로운 신문기사도 참고자료로 찾아놨다. '작년 우리나라 관리소장 평균 급여 380만 원'. 대문짝 만한 글씨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국내 주택관리 실적 1위 업체 소속 1천여 명의 급여 현황을 토대로 한 통계자료였다. 내년에는 평균치가 400만 원대로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미 5%로 확정, 고시된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과 통계청의 물가동향 통계자료도 인터넷에서 찾아 출력해두었다. 물가상승률이 5~6%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였다. 이런 걸 보여준다고 대표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심의자료는 그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모쪼록 성심껏 모아 제시한 자료를 참고하여 대표님들이 최소한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소장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선에서 결정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야흐로 11월 정기 입주자대표회의가 열렸다. 직원 급여 인상률은 심의 안건을 모두 처리하고 난 뒤 맨 마지막 순서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나는 대표들이 자유롭게 토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었다. 문을 닫고 밖에 나가자마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큰소리가 회의장 밖으로 새어 나왔다. 순간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30분 정도 지날 무렵, 들어와도 좋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감사님이 나를 바라보며, 결정된 인상률을 알려주었다. '흠, 목표로 했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군. 솔직히 그럴 만도 하다고 기대했었는데...' 나는 특별히 회장이 리더십을 발휘해 대범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결과적으로 그런 역할은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사실 그 점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감사님의 말을 듣자마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설령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렇게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다짐했었는데, 무심결에 들켜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내년에 무슨 일로 여기를 떠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다음날, 관리사무소에 찾아온  감사님은 나름 최선을 다한 결정이라는 점을 오히려 나에게 심어주고 싶어 했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표님들께서 아주 힘든 결정을 내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님." 나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대표님들이 고민하고 애를 많이 써준 점은 어느 모로 보나 분명해 보여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소장님, 최고!!!" 직원들을 모아놓고 전날 회의 결과를 설명하던 자리였다. 내가 전날 입주자대표회의에서 확정된 급여 인상률을 하자마자 경리 우 주임이 나에게 힘껏 엄지 척을 지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것일까. 직원들은 오히려 예상보다 높은 인상률이라며 기뻐하였다. 짠돌이 대표들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대표님들이 근래에 볼 수 없었던 결단을 내려준 덕분이다. 주변 단지들에 비하면 여전히 아쉬움이 남지만, 한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관리비 인상에 부담을 느끼는 입주민들의 입장과 정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균형점을 찾기가 참 지난하다. 협상은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일하는 성과와 서비스 태도로 결정되는 것임을 새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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