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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윤희 Jan 27. 2022

2021년 2월 7일


비단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몇 년 전이었다. 지인이 자기의 지인 이야기를 하며 ‘떠난 뒤에 그리려고 하니 잘 그려지지가 않더라'라는 말을 전해 들은 뒤부터 조금씩 그려보곤 했다. 그전엔 비단이를 그리는 게 나에겐 어려움으로 느껴졌었다. 묘하게 부조화스러운 형태감을 이겨내고 비단이의 귀엽고 사랑스러움을 표현해낼 재간이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딱히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크게 일지 않았다는 게 더 큰 이유일 것 같다. 비단이가 늙고 점점 아프기 시작하며 그릴 생각이 들었으니까. 비단이도 한창 젊고 나도 젊어서 그랬는지.  


사진을 보고 그릴 땐 몰랐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감정이나 상황들이 잘 떠오르고 명확한 느낌이 있으니까 그리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요 며칠 내년에 할 첫 개인전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스케치들을 끄적이고 있는데 문득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느낌을 그려내는 게 아니라 어떤 통합된 느낌을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답답함이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손끝으로 간신히 잡은 느낌을 스케치하면 왠지 모르게 현재의 감정이 아련하게 스며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아 그릴 수 없구나. 현재의 나는 현재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구나. 비단이가 행복감에 흥분하던 때, 나른한 낮잠, 나의 마음이 비단이로 인해 가득 차 있던 시절들, 비단이의 냄새, 온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느낌들은 현재의 나로 인해 언제든 다른 색감을 가지고 떠오를 수 밖이 없고 기억이란 그런 것이구나. 기억으로 그린다는 건 결국 현재를 그린다는 말이구나.


20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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