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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윤희 Jan 31. 2022

2021년 3월 25일


한동안 몸이 안 좋았다. 위경련이 와서 다시 기운을 차리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몸이 늙음을 느끼는 것은 겸손함을 배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부리는 것이 줄어들고 내게 주어진 것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순간도 생긴다.


이번 주는 그림을 열심히 그릴 생각이었지만 월요일 오전에 생각지도 못한 일로 정신이 산만해졌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작업하려 책상에 앉았는데 창밖으로 고라니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밖을 내다보니 산자락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사냥개 두 마리에게 죽어가는 비명소리였다. 심장이 두근거려 어떡하지 하다가 119에 신고했다. 119분들이 도착했을 때 마침 또 다른 고라니가 나타나자 사냥개 두 마리는 고라니를 쫓아 멀리 가버렸다. 사냥개들을 잡지 못한 채 119분들은 고라니 사체를 자루에 담아 길가에 얌전히 놓아두고 떠나셨다. 청소과에서 치우러 올 거라고 하셨다. 죽은 고라니가 담긴 하얀 자루는 내가 책상에 앉아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곳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가끔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슬쩍 살펴볼 뿐 아무도 그 자루에 관심이 없었다. 자루에 어떤 사연으로 뭐가 들었는지 아는 건 나뿐이 없는 것 같았다. 하얀 자루는 다음날 아침에도 그대로 있었다. 자꾸만 자루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내가 신경 쓰여 주민센터에 치워달라고 전화를 했다. 약 2시간 뒤 자루는 용달에 실려 떠났다.  


주인 없이 활보하는 사냥개에 관해 민원을 넣었었는데 오늘 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사냥개들은 다른 동네에 나타난 멧돼지를 잡기 위해 투입된 엽사의 개들이고 산을 따라 우리 동네까지 온 것이었노라고. 고라니 역시 유해조수라서 사냥당한 것은 문제가 없고 민가 근처에선 앞으로 더 조심하겠다고.


창밖으로 작은 강아지들이 기분 좋게 산책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됐다. 사냥개들이 고라니를 죽인 장소는 작년에 몇 번 보았던 너구리가 볕을 쬐던 곳이기도 하다. 사냥개의 등장으로 앞산에 살고 있을 동물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계절의 변화와 동물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평화로운 나의 풍경이라고 생각했던 장소였는데 망쳐버린 느낌이다. 만약 비단이가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너무 무서웠을 것 같다. 요즘도 개 물림 사고가 종종 뉴스에 나온다.


20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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