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들이 마구 핀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멋대로 흘러간다. 내가 느끼지는 못해도 시간이 흐른 만큼 비단이에 대한 기억도 옅어지고 있을까? 어제 비단이 발 사진을 보고 그리려다가 비단이 발을 찍은 사진이 더 필요한 것 같아 몇 년 동안의 사진들을 쭉 훑어봤다. 조금 신기했던 건 작년에 사진들을 훑어 볼 때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사진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감정이나 상황들이 작년에 비해 평균적?이 된 느낌이다. 전엔 어떤 특정한 감정이 커다랗게 느껴져서 다른 감정들을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다른 감정들의 소리가 들린다.
지난주엔 결혼할 때 샀던 세탁기가 드디어 수명이 다 돼서 새로운 세탁기를 들여놨다. 따로 세탁실이 없는 집이어서 세탁기를 화장실에 놔야 하는지라 이번엔 아주 작은 소형 세탁기를 구입했다. 커다란 세탁기가 있던 자리에 자그마한 세탁기를 들여놓으니 우리 집 화장실 공간도 여유로워 보였다. 널찍하고 말끔해진 화장실을 보면서 먼저 든 생각은 ‘비단이 있을 때 바꿨으면 비단이가 응가 할 때 더 좋아했을까? 미안하네’ 같은 아쉬운 마음이었다. 비단이가 떠나고 나서야 집이 넓어지고 멀끔해지는 게 그냥 미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요즘은 그림 그리는 중간중간 유튜브를 들으면서 작업하고 있다. 우연히 빛에 관한 강연을 발견하고 작년에 잠깐 비단이가 빛이 되어 나에게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빛이 뭔지 궁금했다. 나에겐 너무 어려운 설명들이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한편으론 '비단이가 나를 움직이고 있구나' 라며 나는 어떤 면으로 여전히 비단이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알아듣기 힘들고 그다지 재미없는 영상들이어도 내가 여전히 비단이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싫지 않아서 계속 듣는다.
비단이의 부재로 방황하기 시작한 나의 에너지들이 언제쯤 자리를 찾게 될까.
202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