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윤희 Feb 05. 2022

2021년 5월 4일

수일 전에 샀던 양배추를 어제 드디어 삶았다. 비단이 떠난 뒤로는 양배추를 산 기억이 없는데 오랜만에 사봤다. 비단이가 심장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음수량을 채우기 위해 죽과 유산균 음료를 이용했는데, 죽은 약간의 고기와 이런저런 채소들을 데치고 잘게 다져 쌀과 함께 끓여 먹었었다. 특히나 아침에 입맛이 없던 비단이에게 죽은 좋은 음식이었다. 물론 나는 만들기가 힘들었다. 처음엔 일주일 치를 만들었다가 나중엔 3주 치 4주 치 먹을 양을 한꺼번에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약 2년 정도의 시간 동안 그 죽은 비단이의 아침과 음수량을 책임졌다. 죽 만드는 날 양배추를 다듬는 소리가 나면 비단이는 주방으로 와서 끄릉거리고 짖었다. 맛있는 부분 내놓으라고. 가장 아삭 거리는 줄기 부분만 먹은 채 이파리 쪽은 씹는 척만 하고 뱉어놨다. 배추도 마찬가지로 하얀 부분만 좋아했다. 수박, 배추, 양배추는 다듬는 소리나 냄새가 나면 꿔준 돈 받으러 온 것처럼 주방에서 당당하게 짖었다. 


비단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종종 들여다봤다. 정보도 얻고 다른 사람들 글을 읽으면서 위안도 삼고 했었는데 어떤 회원분들은 자신의 강아지를 케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공부했는지 전문가 같아 존경스러웠다. 그에 비해 나는 비단이의 병명도 간신히 외우고 약 이름이나 용량도  체크하기 벅찬 보호자였다. 내가 비단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매우 위축되고 우울해졌다. 비단이의 건강 상태에 따라 우리 집의 분위기는 행복과 침울함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양배추로 시작된 회상은 비단이의 마지막 한 달을 담은 노트로까지 뻗어갔다. 그동안 감히 펼쳐볼 엄두가 안 나서 책장에 가만 꽂혀 있었는데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노트를 빼서 펼쳐보는 나를 발견했다. 코끝이 찡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비단이의 병환과 나와 남편의 고단함, 우리의 애정 등이 반복된 짧은 단어들에 녹아있었다. 노트에는 한 페이지당 비단이의 하루가 24시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몇 시에 소변을 보고 밥을 얼마큼 먹고 잠은 언제 자고 물은 얼마나 마시고 나타난 증상들은 어떤지. 

왠지 슬픈 기억이 자세하게 떠오를까 봐 노트를 오래 보진 못했다. 그래도 이제 노트를 펼치고 하는 걸 보면 많이 발전한 거 같다. 마음이 전보다 가벼워졌다.


2021.5.4

작가의 이전글 2021년 5월 2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