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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윤희 Oct 09. 2021

2019년 10월 23일

불신지옥.

갑자기 '불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당연스럽게 불신 지옥, 불신 사회, 불신 가정이라는 말들도 떠올랐다. 서로 믿지 못하는 건 지옥처럼 괴로우니까 불신지옥이라는 말이 생겨난 걸까. 물론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인 건 아는데 가만히 생각해봤다. 비단이의 우주를 쥐락펴락하는 나. 나는 비단이의 세계이고 모든 것. 비단이가 나를 믿지 않고 있다. 내가 주는 음식을 거부한다. 비단이의 세계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나마 먹는 즐거움이 남아 있었는데, 단 하나 있는 그걸 내가 뭉개버렸다. 비단이는 이제 사는 게 즐겁지 않다. 삶을 지속시키는 활력이 점점 떨어진다. 비단이는 급기야 나를 피한다. 자기 세계를 거부한다.  


이런 생각까지 들으니 내가 비단이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 비단이가 며칠째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약 시간 지키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밥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후 '약만' 주자. 그동안 각종 먹을 것들에 약을 섞는 비겁한 짓을 하는 동안 비단이의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그런 '짓' 하지 말자!


마음에 조급증이 일어 집중이 안 되지만 억지로 그림을 그리며 비단이가 밥을 먹는 때를 기다렸다. 뭘 먹을지 몰라 4가지 정도 밥상에 놓아줬는데 오후 5시가 넘어가니 밥상에 와서 냄새를 맡는다. 배가 고픈데 먹고 싶지 않은 것 같다. 6시 정도 되니 그중에 제일 끌리는 밥으로 한 그릇을 대충 비웠다. 이때다 싶어 식후에 먹어야 할 약인 '항생제'를 물에 개어 아기 약통에 담아 억지로 입에 넣었다. 그리고 현재 유일하게 먹는 간식인 오리고기 육포를 칭찬하면서 조금 줬다. 그리고 시계를 본다. 항생제는 12시간을 못 지키고 9시간 만에 준 셈이다. 빈속에 먹느니 시간을 안 지키는 게 낫겠지. 이제 공복에 먹을 기침약이 포함된 심장약 먹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며칠간 지켜본 결과 비단이는 심장약을 복용하기 전엔 식욕이 미약하게나마 있긴 한데 약을 먹고 나면 물만 마시고 기력도 없어하고 특히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의사는 약이 식욕을 확 떨어뜨리는 부작용은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내가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보면 약 먹기 전 식욕이 그나마 있을 때 밥을 먹어야 한다. 그 후에 소화되길 기다렸다가 약을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밥을 먹어야 기력이 돌아오고 기력이 돌아와야 입맛도 좋아질 테니까.  이제 정말 약만 주자. 불신의 구덩이는 바로 음식에 약을 타서 비단이를 기만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아기 약통에 가루약을 넣고 물을 넣어 잘 섞는다. 그리고 오리고기 육포 간식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 맛있는 냄새를 많이 풍기게 한 후 먼저 간식을 조금 주고 약을 준다. 목 디스크가 있었던 지라 매우 조심해야 하고 약의 양이 좀 많아 한 번에 주진 못한다. 입술에 잔뜩 묻히고 흘러 온전한 약 효과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은 하지 말자. 약을 다 먹이면 쓰다듬으면서 눈을 맞추고 간식을 준다. 입도 닦아주고 주저리주저리 말도 걸어 준다. 이상하게 쓴 약을 잔뜩 먹었는데도 비단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불신에 금이 간 걸까.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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