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어느 날의 글
비단이와 산책 할 때면 항상 보이던 개가 있었다. 작은 덩치의 말티즈였는데 비단이처럼 노견이었다. 내가 말을 걸었는지 견주가 다른 사람과 하던 이야기를 들은 건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그때 비단이보다 나이가 많았어서 동안이라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성질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보호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성이었다. 낮에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 같은 백수나 노인, 중년 여성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당연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덩치 큰 남자가 성질이 꼬장꼬장한 작은 말티즈를 애지중지 시중드는 모습은 재밌으면서도 측은하기도 했다.
오늘 문득 비단이가 떠난 지 4년째임을 떠올리고는 내심 놀랐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흐른 건가? 한 일 년쯤 된 일인 것 같은데... 이른 저녁을 먹고 평소처럼 동네를 천천히 걷는데 그 말티즈가 생각났다. 비단이가 떠난 후에도 동네를 산책할 때면 그 개를 보곤 했다. 비단이를 보낸 지 오래되지 않아 자책감도 있었을 때라 그 남자의 살뜰한 살핌에 부끄러워했던 느낌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그 말티즈를 보지 못한 게 한참 된 것 같았다. 작년에 못 본 건 확실하고 재작년에도 못 봤던 것 같다. 노견이었으니까 안 보이면 생을 마쳤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견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가 비단이를 보내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주변 사람들은 모르는 것처럼 그 사람도 굳이 티를 내지 않고 묵묵히 지내고 있겠지. 기계 같은 성실함이 느껴졌던 사람이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작은 말티즈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었을 공간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나는 어떻게 견뎠더라?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두루뭉술한 기억, 뾰족하게 조각난 기억, 씁쓸함, 무력감 등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견디고 자시고 할 게 아니란 걸 알았지, 당시엔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썼던 메모가 없었다면 비단이를 애도했던 시간은 압축되고 흐릿해지고 퇴색했을 것이다.
비단이를 보낸 지 시간이 좀 흘렀지만, 다시 개와 함께 지낼 용기는 없다. 당분간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홀가분한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