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도파민, ADHD, 우울증, 그리고 무기력

극단적 무기력을 이겨내기 위해

다른 증상은 제외한 채 극단적인 무기력만이 남은 상태. 1년 간의 회복 과정을 거치고 발리와 싱가폴에서 꿈같은 시간은 보내고 난 후 나에게 남은 것이었다. 처음 발병했을 때에는 여러 증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면 이 때는 오로지 '무기력'만이 지배하는 상태였다. 외부의 시선에서 보자면 몇 시간이고 누워있기만 하고 있다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했지만, 내 안에서의 시선에서 보자면 많이 달랐다.


첫 발병 시기에는 내 몸과 정신 모두가 내 의식과 분리된 듯이 누워있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배터리가 방전되고 기름도 다 떨어진 자동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과 같았다. 시동도 걸리지 않고 액셀을 밟아도 핸들을 돌려도 움직이지 않는 차와 같이, 그저 누워있는 나 자신을 인지하는 것 외에는 내 의식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반면 이때의 상태는 배터리도 있고 기름도 채워진 차 안에서 내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 가까웠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으면 차가 굴러갈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차를 나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교하게 표현하자면 차가 나아가는 게 싫었던 것은 아니다. 움직이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것을 피한 것이 아니라, 그저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씩 누워있다 보면, 어느 한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어나 사무실을 향했다. 막상 사무실에 가면 아무렇지 않게 일을 했다. 내부 회의를 하고, 고객사를 만나고, 서류 작업과 행정작업을 하고, 동료들과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퇴근을 하고, 아내와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잠들었다. 특별히 이전보다 잠이 오지 않거나 더 잘 자지도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 날은 그런 일상적 흐름대로 출근을 했고, 어느 날은 무기력에 빠져 또다시 이불속에서 몇 시간을 누워있었다. 어떤 패턴이나 예고도 없었다.


약 2주일간 경과를 지켜보았다. 마치 아침마다 누군가가 동전을 던지고, 앞면이 나오면 나의 무기력 버튼을 누르고 뒷면이 나오면 정상버튼을 누르는 것 같이, 내 의지나 행동이나 사건과는 무관하게 무기력이 찾아오거나 또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몇 가지 부정적인 결과가 뒤따랐다. 잠에서 깨어 하루가 시작될 때 어떤 버튼이 눌려있을지 몰라 두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많이 자고 늦게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보면 하루 일과의 시간이 줄어들고 일상에서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그러니까 회사 일 뿐만 아니라 집에서나 지인관계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까지 수행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조금씩 쌓이게 되고, 이는 점차 심리적 부담이 됐다. 그러다 무기력 버튼이 눌린 채 하루를 시작하면 그 부담은 더 커졌다. 그 부담감은 자책감, 위기감, 나아가 공포감까지 이어졌다.


이런 악순환이 시작될 무렵, 이대로 호전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다시 상담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결심한 날을 기준으로 가능한 한 빠른 일정으로 예약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새로운 상담센터로 예약을 하게 됐다. 이미 상담치료를 경험해봤다 보니, 당분간 벌어질 일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상담가 선생님과 작년부터 1년간 벌어졌던 일이라든가, 그전 상담 과정에서 돌아봤던 과거라든가, 그 과거로부터 발견해 낸 단서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지금의 상태에서 대해서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 시간을 그냥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게 됐다. 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책이나 영상이었다. 키워드는 '무기력'이었다. 여러 자료들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주인공처럼 언급되는 단어는 바로 '도파민'이었다.



도파민이라는 단어는 요즘에는 정말 익숙한 단어가 돼버렸다. 아무래도 애나 렘키의 <도파민 네이션>이라는 책의 영향이 클 것이다. 온라인 쇼핑, 숏폼 비디오, OTT, 게임 등 다양한 자극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든 쏟아질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도파민이 과잉 분비되어 내성이 생기고, 점차 일상적인 행복에서 멀어진 채 과잉자극에 탐닉하게 된다는 내용은 많은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환기시켰다. 숏폼 비디오를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1~2시간이 훌쩍 지나있는 것을 경험한 현대인이라면 이 책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 이론의 인기와 대중화로 많은 이들이 '도파민'이라는 단어를 친숙하게 사용하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유튜브 영상들이 '도파민에 절여진 뇌', '도파민 중독'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나 같은 ADHD인에게 도파민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익숙한 키워드이다. ADHD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도파민 재흡수 과활성'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ADHD 환자에게 처방되는 약은 '도파민 재흡수 억제제'이다. 여기서 '재흡수'란, 말하자면 뇌에서 분비된 도파민을 수거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ADHD 환자들이 도파민의 재흡수가 과활성 돼있다는 것은 도파민이 뇌의 시냅스에 머무르는 시간이 아주 짧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흡수를 지연시키는 억제제를 사용함으로써 도파민이 머무르는 시간을 늘리는 것으로 증상을 줄이는 것이다.


볼프람 슐츠(Wolfram Schultz)와 같은 도파민 연구의 권위자들이 발견한 내용들과 최신 이론들을 종합하면, 도파민은 '행동의 동기'를 만드는 신경전달물질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도파민은 어떤 행동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 보상으로써 분비된다. 쥐 실험을 통해 어떤 버튼을 누를 때 먹이를 주는 장치를 한다면, 쥐가 아무렇게나 움직이다가 버튼을 눌러 먹이를 갖게 됐을 때 도파민이 분비된다.


또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도파민은 행동의 결과뿐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분비된다. 배고픈 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 버튼을 눌렀을 때 먹이가 쏟아져 나왔던 기억을 떠올리면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버튼을 다시 누를 '동기'를 형성한다. 다른 행동 보다도 더 많은 도파민 분비를 경험한 행동을 생각할 때 도파민이 분비되어 그 행동을 실행하게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특정행동만 집착하게 되어 중독에 이르는 셈이다.


이 관점에서 '무기력'이라는 증상을 이해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도파민 수준이 매우 낮아져 있는 상태. 내가 해야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수행하고 나서도 도파민이 수준이 낮고, 그로 인해 그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도파민의 수준이 낮아, 결국 그 행동을 시작하려는 동기가 전혀 생기지 않는 상태.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어설픈 가설을 하나 세우게 됐다. ADHD 약은 보통 아침에 한번 먹기 때문에 약효가 저녁쯤에는 거의 없어지고,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아침에는 도파민 재흡수가 가장 과활성 돼있는 상태일 것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 내 뇌의 도파민의 절대적 수준이 낮은 상태라면 아마도 아침에 약을 먹기 전 시점의 도파민 수준이 하루 중 가장 낮은 상태일 것이다. 출근과 회사업무라는 활동의 의미가 내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경제적 상황이 어떻고 하는 깊이 있는 고민을 하기 이전에, 그냥 단순히 도파민 수준이 너무 낮아서 이런 무기력함이 발생하는 거라면 어떨까?



이후 신경정신과에서 좀 더 다양한 약을 처방받고, 상담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파민에 대한 나름의 노력을 시작했다. 요점은 건강한 방식으로 도파민 수준을 높이는 방법들을 시도해 보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된 자료는 전에도 언급한 앤드류 후버만 교수의 방법론이었다. 그중 비교적 특이한 것들은 이렇다.


1. 숏폼 비디오, 소셜 미디어 사용 줄이기

도파민 네이션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이 콘텐츠들은 도파민을 과잉 분비시키는데, 앤드류 후버만이 특히 더 강조하는 건 이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도파민의 분비를 높인다는 점이다. 시선을 끄는 영상을 보면 도파민이 즉각 분비되고, 이 것이 몇십 초 단위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을 1시간 이상 유지하면 도파민에 내성이 생겨 점점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내가 하는 노력은 단지 손가락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뿐이다. 이런 최소한의 노력과 매우 신속한 보상이 누적되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보상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활동에 대한 동기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너무나 지저분한 책상이 있더라도 그걸 치우기보다는 숏폼 비디오를 조금만 보고 싶은 것이고, 그보다 더 호흡이 긴 활동, 예를 들면 자기 계발을 위해 어떤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것과 같은 활동에 대한 동기는 더욱 줄어든다.


2. 찬물 샤워 또는 목욕

직관적이지는 않지만 앤드류 후버만의 대표적인 키워드로 자리 잡은 '찬물 샤워'는 최근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내용이다. 예전부터 아주 추운 날씨에 얼음을 깨고 입수를 하는 것은 운동선수들이나 군인들이 하는 수련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인내력을 기르는 목적으로 이해 돼왔지만, 최근 연구들은 찬물에 노출되는 것이 도파민 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인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숏폼 비디오나 마약 같은 것들이 급격히 도파민 수준을 높이고 다시 급격히 떨어트리는 반면, 찬물에 노출되는 것은 비교적 빠르게 도파민 수준을 높이면서도, 그 수준을 몇 시간 정도 유지시키며 서서히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 외 자주 언급되는 내용들은, 중요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좋은' 습관들이다. 충분한 운동, 명상, 영양가가 고른 식단, 충분한 수면, 충분한 햇빛을 쬐는 것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숙지하면서 생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무기력증이 모두 나았다'라고 쓸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확실히 차이는 있었다. 숏폼 비디오나 소셜미디어를 아예 끊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한두 시간이 훌쩍 가버리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만으로도 시청량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특히 자기 직전에 숏폼 비디오를 보다가 바로 잠이 드는 일은 신경 써서 피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무기력함의 수준이나 빈도가 어느 정도 줄어드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찬물 샤워도 병행했다. 한동안은 매일 같이 찬물로 샤워를 했고, 어떤 시기에는 며칠에 한번 꼴로 시도했다. 찬물로 샤워를 한다고 해서 대단히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 건 아니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서의 기분을 비교하자면 평소와 같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때에 비해 조금 더 상쾌한 느낌이 들긴 한다. 어느 정도 반복하다 보니 그보다 더 큰 기능은 '하기 싫은 걸 참아내고 실행하는 것'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물 샤워를 많이 반복해 봤다고 해서 다음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찬물 샤워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현재 시점으로 보자면 거의 반년동안 평균적으로 주 3회 이상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있는데 아직도 아침마다 샤워기의 물을 틀기 전이면 잠깐 고민을 한다. 오늘은 그냥 따뜻한 물로 편하게 할까, 오늘도 찬물로 할까. 앤드류 후버만도 '찬물'의 기준을 이렇게 정의한다. '불편할 정도로는 차갑되, 위험할 정도로 차갑지는 않게'. 그러니까, 매번 불편하긴 불편한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적어도 찬물샤워 정도로 불편한 행동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다. 그냥 습관적으로 미루던 것들 중에서, '이 정도는 지금 하지 뭐'라는 마음을 먹고 행동에 옮기는 것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작은 실천들을 추가하면서 얻게 된 가장 큰 효과는, 새로이 찾아온 극단적 무기력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몸에서 벌어지는 불균형의 영향을 내 노력으로 조금씩 회복한다는 시각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미 1년 전에 '나는 왜 이러지', '나는 틀려먹었나' 같은 자기학대적인 생각으로 쉽사리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과 비교할 때, 이 문제를 조금 더 객관화한 채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은 훨씬 더 안정적인 발판을 밟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가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던 막막함을, 나름의 방법으로 다시 한번 걷어내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이전 15화 다시, 원점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