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rd는 육아도 nerdy하게
외고 졸업에 심리학 경영학 학사이지만 nerd의 기질을 타고났다. 문과생 주제에 특기과목은 내내 수학이었고, 다분히 감정적인 상황에서도 if문 돌리듯 사고하는 것이 습관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삶의 구석구석에 독립변인과 종속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비 행위 하나하나도 부르디외적이라기 보다는 레이 커즈와일적이다.
이런 성향은 육아에도 적용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나날들이다. 물론 육아용품이나 방법론에 대해서는 내가 독단적으로 선택할 생각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일단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nerdy한 접근을 멈출 수 없다. 아내가 특별히 멈추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천기저귀의 사용은 어떤 면에서 볼 때 vegan과 같이 문화적 측면이 강해보일 수 있다. 부부가 모두 출퇴근을 하는 경우 사실상 선택 불가한 옵션이기도 하다. 꼭 그렇지 않은 경우더라도 세탁, 건조, 준비 싸이클을 일일 단위로 가져가기는 누구에게나 부담되는 일이다. 우리 부부의 경우 나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래도) 출퇴근을 하는 입장이고, 아내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아내에게 부담을 줄 가능성이 아무래도 크다. 우리 사는 세상엔 야근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천기저귀는 내가 선뜻 제안할 수 없는 옵션이었다.
한편 이런 면도 있다. 남자들은 평생 생리대를 사용해보지 않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흡수력을 지니는 그 재질이 실제로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기의 신체 중 가장 취약하다고 할 수 있는 부위에 24시간 찰싹 붙어있는 걸 몇년씩 이어가야하는데, 아무래도 남자로서는 그것이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관심과 경험이 적은 채 살아왔으니 말이다. 결국 어떤 방향이든 아내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옳은 사안이었다.
최근 생리대의 유해물질이 이슈가 되기도 하는 가운데, 아내는 장모님과 상의 끝에 천기저귀를 병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천기저귀 문화가 국내 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재조명되고 있어서, 편리한 제품들이 많이 출시돼있다. 내가 어렸을 때의 그 노란 튜브형 고무줄로 묶는 천 기저귀는 구시대의 상징이 된 지 오래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중인 천기저귀는 커다란 가제수건을 접어쓰는 형태. 이 외에는 아예 봉제가 되어 판매되는 형태가 있는데 우선은 접어쓰는 형태를 선택한 것은 장모님의 경험에 바탕했다. 아무래도 신생아는 변의 양도 적고 냄새도 심하지 않아 생각보다는 사용이 어렵지 않았다. 세척솔로 긁어내고 따로 세탁하며, 이따금씩 삶는다. 밤마다 세탁해서 아기가 자는 방에 건조대를 같이 놓고 널어두면서 가습기 역할을 대신하고, 워낙 얇다보니 아침에는 잘 말라있다. 다 마르면 삼각접기를 해야하는데, 어린시절 '동서남북'을 접던 기억을 떠올리면 쉽게 익힐 수 있다. 일종의 루틴이 발생한다.
기분탓인지 모르지만, 기저귀를 갈았을 때 아이의 반응이 종이기저귀에 비해 좀 더 좋아보인다. 종이기저귀의 흡수판 부분이야 보들보들하지만, 외곽의 주름막 부분은 아무래도 천기저귀의 부드러움에는 비하기 어렵다.
단점은, 일단 번거롭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기저귀를 가는 도중 아이가 2차 공격을 가할 때 심리적 데미지가 좀 더 크다는 점이다. 차라리 내 손에 쌌을 때, 묘하게 안도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쯤에서 정리하기엔 아쉬우니 조금 더 들어가보자. 관련 연구에 따르면, 온습도 면에서 피부에 끼치는 영향은 종이 기저귀들의 브랜드 간 차이와 천기저귀의 차이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피부온도에 있어서는 천기저귀가 약간의 장점을 지닌다.
http://m.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934158
물론 너무 오래된 논문이라 현재 시점의 제품들관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천기저귀가 확연한 장점을 지닌다고 볼 근거는 적어보인다.
그렇다면 일회용 기저귀의 '흡수력'을 만들어내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이 도마에 오를 수 있다. 안그래도 연초에 P&G사의 모 제품이 유해물질 논란에 휩쌓인 적이 있다. 이 부분은 아직 이렇다할 결론을 내기 어려운 상태다. '기저귀'라는 제품에 대한 유해물질 기준치가 확립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를 링크한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297254#cb
그 밖에 생각해볼 수 있는 비교지점은 경제성이다. 일회용은 말 그대로 일회용이므로 계속 구매해야한다. 천기저귀는 물리적 손상이 임계점에 이를 때 까지 반복 사용하므로 장기적으로 저렴할 수 있다. 해외 비교차트를 보자.
http://clark.com/family-lifestyle/cloth-diapers-vs-disposables-c/
천기저귀도 가지각색이라 딱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 2배 이상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마저도 어느정도 천기저귀에 유리한 비교인 것이, 세탁에 들어가는 부수적 비용도 있거니와, 삶다가 태워먹는 경우, 빨다가 찢어지는 경우, 무엇보다도 사놓고 귀찮아서 잘 안쓰는 상황까지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종이기저귀를 쓴다고 찝찝해하거나 아이에게 미안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종이기저귀가 편리하다는 장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천기저귀의 절대적 장점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그것은 의외의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천기저귀는 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변을 최소한 한번 더 보도록 유도한다. 솔로 긁어낼 때면 의도치않게 변의 텍스쳐까지 느낄 수 있다. 마치 손으로 집어 먹는 스시가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스시보다 맛있듯이, 한가지 감각을 더 사용하는 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도 면에서 큰 차이를 지닌다.
마치 슬로우 라이프의 철학과 같이, 아이의 아주 작은 한 파편적인 면에 아주 조금이나마 더 지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
천기저귀의 가장 유니크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종이 기저귀의 변을 괜히 솔로 긁어내본다면 얘기는 달라지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