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조리원 없이 집에서의 2주
아내는 산후조리원을 선택하지 않았다. 나의 선호도를 묻는다면 나 역시 산후조리원의 선호도가 높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에게 산후조리원이라는 이슈는 내가 선택할 권한이 없음은 물론 의견을 갖는 것도 옳지 않다 생각했고, 오로지 아내의 선택에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의견이 같았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산후조리는 집에서 하게 됐다.
무엇보다 아내는 산후조리원에서 예상되는 일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답답하고 지루할 뿐더러 아기와 늘 같이 있지 못한다는 점 등의 이유다. 또 누구보다도 세명의 딸을 키웠을 뿐 아니라 간호사이신 장모님을 신뢰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자연주의 출산의 경우 산모의 컨디션 회복이 상대적으로 빠르다는 특징도 있었다. 물론 산후조리원의 경제적 타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느덧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면 머물렀을 2주가지났고, 아내도 나도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를 할만한 별다른 문제가 없는 반면, 예상했던 장점들은 모두 생각대로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다만 딱 한가지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점은, 집에 있더라도 아내는 어느정도 답답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첫 1주는 사실상 집밖을 나설 수 없었다. 비 까지 와서 더더욱 그래야했다. 집안에서 1-2시간마다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고 잠을 재우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오늘은 며칠인지,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단절된 느낌을 어느정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답답함은 애초에 '조리원에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본인의 상태에만 집중해야하능 '여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었다.
남편으로서, 육아를 아내에게 떠넘기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긴 하지만, 이 여건의 차이에서 오는 불균형까지 허물 수는 없었다. 나는 어쨌든 출근을 하고, 출근을 해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똑같은 생활을 한다. 조심해야 할 음식도, 기온도, 행동도 없다. 집에 있을 때 만큼은 되도록 내가 일을 많이 하고 아내와 장모님을 쉴 수 있게 하고 싶지만, 사실 기저귀 갈고, 빨래를 돌리고, 젖병을 소독하고, 분유를 먹이는 정도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이 모두를 100% 내가 하지도 않을 뿐더러, 혹여 100%전담한다 해도 그것이 모유수유와 관련된 모든 것 보다 덜 힘들어보였다.
아내의 출산과정을 함께하고, 육아 과정에서 최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아내의 헌신을 뛰어넘을 방도가 없었다. 그 와중에 아이는 속절없이 예쁘다. 아빠가 된다는건, 요즘말로 꿀빠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게 꿀을 빨면서 늘어가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은 커다란 빚처럼 평생 조금씩 갚아나가는 수 밖에 없어보인다.
신생아는 기본적으로 먹고, 자고, 싼다. 이 셋을 모두 하지 않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 정도 밖에 안되는 듯 싶다. 반면, 가끔은 저 세가지를 동시에 해내기도 한다. 젖을 물다 잠든 채로 싼다. 그 장면을 목격할 때면 묘하게 내가 성취감이 든다.
분명 신생아는 시력이 거의 없다고 하고, 촛점을 맞추지 못한다고 하지만, 왠지 다 보고 다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딘가를 골똘히 바라보기도 하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동자가 움직이기도 한다.
다른 아이는 물리적으로도 같은 공간에 전혀 없고, 있다 하더라도 내 안중에는 없을 것이므로, 상대적인 성장 속도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왠지 엄청나게 빨리 크고 있는 것만 같다. 얼굴의 붓기가 빠져 제법 눈매가 또렸해졌고, 팔다리도 살이 올랐다.
아이는 유난히, 아니 사실 유난한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어땠든 팔다리를 움직이는걸 좋아한다. 팔다리가 제약돼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을 내기도 한다. 속싸개를 풀어주면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즐거워한다.
아마도 금새 목을 가누고 잡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랜덤한 율동을 더이상 못보겠지 싶은 마음에, 그럴 때면 한참을 넋놓고 쳐다보게 된다.
아이가 잠들고 나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 전에 아내가 얘기 했다.
'큰 파도 위에 올라타 있는 느낌'
나는 나름대로 아마추어 글쟁이이기도 하고, 특히 정확한 비유를 할 때 희열을 느끼는 타입인데, 아내의 이 표현은 순간 숨이 탁 막힐 정도로 정확했다. 이 아기가 매순간 어떻게 할 지 부터, 아프진 않을지, 어떻게 클지, 어떤 사람일지 우리는 부모로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큰 파도가 그냥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듯, 아이는 그렇게 살게될 삶을 살아갈거다. 우리는 그 과정 모두의 중심에 있다.
무력하다면 무력하고, 무섭다면 무서우며, 설레인다면 설레인다. 어느 하나도 거짓이 아니고, 이 모두가 공존한다. 그렇게 보내는 순간 순간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아이가 보여준 배냇짓은 내일이면 다를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다. 그렇게 매 순간, 아이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한동안 물끄러미 아이를 보노라면, 이 무력함과 무서움과 설레임의 파도 위에 널판지 하나를 올린 채 앉아있는 아내와 내가 느껴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것은 사실 우리의 삶 그 자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러했고, 태어난 후에도 똑같다. 모든 순간은 유일하고 우리는 그 순간을 최대한 담아내려 한다. 내 삶이라는 건 내가 소유한게 아니라 늘 순간순간 스쳐가는 것이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이런 니체적인 깨달음 까지 안겨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