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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00to200

기회를 준다는 것

‘언제 이렇게 컸어.’


애 키우는 집에서 입에 달고 사는 말. 남이 보기엔 클리셰일지 몰라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매번 진심으로 하는 말. 그 당사자가 되기 전엔 몰랐다. 모든 클리셰는 클리셰가 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만큼 그 진심이 보편적이라는 이유.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은 100일이 될 때 즈음 밤잠을 잘 자기 시작하면서 그간의 힘겨운 밤시간 사투를 졸업한다는 감사의 의미를 담는 말이다. 우리 아이의 경우에는 의미가 조금 달랐다. 아이는 고맙게도 6주 전후부터 밤잠을 잘 자 주었다.


그래도 100일이라는 기간이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는 있었다. 긴장감의 한 모퉁이가 사라진다는 것. 100일 이전의 아기는 코스모스의 꽃대, 민들레의 씨앗, 손바닥 위의 눈송이 같았다. 누워 있던 아이를 단순히 안아 올리는 과정에서도 목이 꺾일 것만 같은 가녀림은 익숙해지지도 않고 익숙해져서도 안될 일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아차 하는 순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매순간 지녀야만 했다. 그 일부를 덜어낼 수 있었다.




변화를 느꼈던 건, 시험삼아 점퍼루에 잠깐 앉혀봤을 때 였다. 아직 휘청거리긴 했지만 의도를 지닌 손놀림은 목표한 물체를 잡아냈고 아이의 표정엔 만족감이 드러났다. 발을 구르기도 하고 좌우를 돌아보기도 했다. 아이의 몸이 ‘기능’하는 것을 목격한 순간, 놀랍고 뿌듯했다. 혹시 무리가 될까 아주 잠시만 앉혀보고 다시 안아들긴 했지만, 머지않아 점퍼루에 타고서 뛰어놀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놀라움과 뿌듯함의 이면에서 미묘한 서운함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제 다시는 종일 안아 키우던 시간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생각. 예의 그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실제로 지났다는 새삼스런 깨달음. 아이를 대학교 기숙사에라도 보내야 느낄법한 감정의 맛보기 예고편 같았다. 하기사, 세상 만사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일 자체가 없으니 이 감정은 살아가는 매순간 느껴 마땅할 감정이다. 그냥 매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겠다는 일반적 교훈으로 매듭짓는 편이 좋겠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폭넓고 즐겁다. 아기띠나 유모차에 대한 불안감이 비약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슬슬 나들이 외출을 시작할 수 있다. 잘 지탱해주면 앉는 자세가 가능하므로 아이 사진의 포즈가 대폭 다양해진다. 게다가 태열기가 가라앉으면서 객관적으로 더 예뻐진다. 아이의 감정표현이 정교해지면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큰 버라이어티를 갖는다. 그리고 아이의 행동과 표현에 점차 일관된 ‘의도’가 발견된다.


이 일관적 ‘의도’의 등장이 100일 이후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새로이 고려해야 할 축을 만들어낸다. 이 축은 마냥 즐겁기 보다는 부담감을 가져오는 축이다. 의도가 성립한다는 건 이제 아이가 ‘사건의 인과’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이제 제법 기억과 학습이 작동한다는 것이 된다. 100일 이전의 시간은 아이의 ‘생존’ 그 자체가 최우선의 목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교육’이라는 목적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 부담되지 않을 리 없다.




아이가 밥 때가 되어도 분유를 먹지 않으려 할 때. 그러다 새벽에 깨어 울다가 젖병을 물려야만 다시 잠이 들 때. 소위 ‘등버튼’이 발동해서 안아들고 있어야만 울음을 멈출 때와 같이 자잘한 고민상황이 수없이 있다. 이는 100일 전후를 가리지 않지만, 100일 이후에는 확실히 패턴이 반복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아이를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대응 방안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진다.


문제는, 이에 대한 조언의 내용도, 그 각각의 효과도 사람마다 아이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육아에 대한 경험담을 논의하다 보면 줄곧 ‘그럼 내가 애를 잘못 키웠단 말이냐’는 반응이 쉽게 유도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비교나 검증이 힘들어진다. 결국 이렇다 할 정답풀이를 확보하지 못한 불안감 속에서, 문제 상황은 계속 주어진다. 그 와중에 다른 차원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개입되면 아마도 부모의 이성은 표류하게 될 거다. 그러다 보면 젖먹이 아이에게 욱하고 짜증을 내는 부모들도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다행하게도 나와 아내는 그런 서글픈 상황을 맞지 않고 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기본적으로 타고난 복 덕분이 크겠지만, 현실적인 계기가 있었다. 주제는 첫 수면교육이었다.




100일 전후로, 부쩍 아이가 안고 달래야만 밤잠을 잤다. 안아재우는 것 자체야 힘들 건 없었지만, 문제는 이런저런 일로 안아줄 수 있을만한 시간이 지연될 때 였다. 혼자서 잠에 들지 못하다보니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다음날은 원래 자던 시간에 잠들려 하지 않는 악순환이었다.


아내와 나는 상의 끝에 조금 울더라도 안아 재우지 않아보기로 했다. 소위 울려재우기였다.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지난 백일간 가장 일관된 신뢰도를 보여줬던 프랑스 의사의 책이 이 어려운 선택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우에 따라 한시간 가까이 괴성을 지르며 우는 아이들도 있지만, 다양한 연구 결과 이는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 그 증거로써 아무리 오래 울더라도 아침에 일어날 때 천사처럼 웃는 미소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약속과 함께.


이를 악물고 처음 시도한 날의 기억이 선하다. 십분 간격으로 들어가 확인한 아이의 눈에 구슬만한 눈물이 또르르 굴러내리고, 그 눈물이 이불을 적시기까지 할 때의 무너지는 마음. 그냥 평생이라도 안아재우고 말지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배가 고프지도, 아프지도, 기저귀를 갈아야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심하게 운다고 안아주는 순간, 당신은 아이에게 심하게 우는 법을 가르친 것이 된다. ‘


그렇게 약 2-30분이 지날 때 쯤 긍정적 신호를 감지할 수 있었다. 우는 와중에 이따금씩 울음을 멈추는 시간이 생기고,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4번째 쯤 방으로 들어가 아직 흐느끼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꼭 잡은 아이는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는 아침이 되어서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렇게 아이는 우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어느 날은 놀다 그냥 잠들기도 했다. 물론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꼭 울려재우기 방식이 옳았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건 어떤 방법론이 더 옳으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하고 소중했던 건, 깨달음이었다. 내가 혹여 그날 어느 시점에 그냥 안아재우기로 했다면, 나는 아이로 부터 ‘혼자 잠이 들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에 대해 ‘안아야만 잠이드는 아이’라는 이름표를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 이름표는 어쩌면 앞으로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동안 아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는 기회를 준 것이었고, 아이는 고맙게도 그 기회를 잡아주었고, 그래서 아이는 ‘혼자서도 잘 자는 아이’가 되었다.


물론 그 이후의 현실은 그렇게 동화적이지만은 않았다. 200일에 가까워지면서 의도가 강해지고 구체적인 욕구와 의지를 발달시키는 아이는, 때때로 심하게 울며 잠이 들지 않기도 했고, 자주 새벽에 울며 깨어나 젖병을 물려야만 잠이 들기도 한다. 그 가운데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혹시 이렇게 수면교육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 걱정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이미 아이는 혼자서도 잘 잠에 든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여전히 아이를 ‘혼자 잘 수 있는 아이’로 유지시킨다. 그러므로 울며 보채는 동안에도 아이는 ‘밤마다 보채는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채고 있는 중’에 멎는다. 안아야만 잔다는 것과 어제는 안아 재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결국 결정은 아이의 몫이다. 만사 모두에 대해 기회를 주고 기다린다고 모조리 해낼 사람은 없다. 분명 아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을 것이다. 기회를 준다는 것이 무책임한 방치의 핑계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반대로, 모든 일에 부모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지나치다면, 어느 시점엔 아이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는 것 정도이겠지만 그것이 나중에 더 커서는 힘겨운 경험을 할 기회, 그걸 이겨낼 기회, 또는 끝내 실패를 맛볼 기회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먼저 결정해버리지 말 것. 아이에게 기회를 줄 것. 그 기회를 활용하는 모습을 또렷이 지켜볼 것. 실패한다면 언제라도 다른 기회가 있음을 알려줄 것. 성공한다면 함께 기뻐할 것. 나의 기대나 실망만으로 아이에게 이름표를 멋대로 붙이지 말 것.


그런 동안 어느새, 아이에게 신뢰라는 것을 갖게 됐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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