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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wover Jun 26. 2017

82년생 김지영

내가 '모를 뿐'인 사실을 '없다'라고 이야기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최근 친구들 사이에서,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던 책이었다.

읽은 사람의 대부분은 여자였고 반응은 격했다.

"출근길에 읽지 마. 나 지하철에서 엉엉 울면서 읽었어."


심지어,

이 책을 스스로 찾아 읽는 남자를 소개하여달라는 친구.

책을 읽고 공감하며 여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친구.

이들의 서평을 듣고 내가 기대한 것은 '강력함'이었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 조금쯤은 자극적인 사건들을

모아 '이것 봐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라니까'를 보여주고 있는 책일 것이라고.


책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담담했다'. 책을 읽는 나도 화가 나고 슬프다기보다는 담담한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 나갔다.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체크리스트가 그려졌다. 김지영 씨가 겪은 일들 중 나에게도 해당하는 일들에 체크를 해나갔는데 빈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김지영 씨가 만났던 바바리맨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누가 나를 만지는 것이 잘못임을 인지하지도 못했던 나이에 공원에서 은근슬쩍 나와 친구들을 만지던 아저씨를 만났다.  그날 집에 와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조잘대던 중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뭐가 잘못된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고 무서웠던 기억이다.

웃으며 번호를 물어보던 남자가 거절의 표시에 '누가 사귀자 그래? 연락하고 지내자고!'처럼 화를 내거나 팔을 잡아당기는 등의 돌발행동을 보이는 경우의 수는 생각보다 적지 않다.

'난 술은 여자가 따라주는 거 아니면 안 마셔'라며 술잔을 내미는 선배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고, 새벽 택시를 타고 겁먹은 나를 보고  '무서워서 친구한테 전화한 거야?(히죽거리며) 뭔 일 나면 친구가 올 수는 있대고?' 라며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다.


김지영과 비슷한 경험을 늘어놓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남자가 어떻다느니 여자가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저 세상에는 좋은 점이 가득한 만큼 어두운 면도 있지만, 우리는 그 어두운 면들을 모두 인지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저 일들을 직접 겪어봤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있는 저런 면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저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지금은 저런 어려움과 차별이 모두 사라졌다고, '없다'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 그런 어려움, 어두움, 부당함, 불편함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겪어보지 않아서 '모를 뿐'인데.


82년생 김지영은 여자들이 더 잘 아는 (남자는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두운 면을 담담하게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면은 남녀문제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

몇 년 전에 보도블록의 노랗고 울퉁불퉁한 블록이 몇몇 길에서 사라졌다.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 때문에. 점자블록이라고 불리는 이 보도블록은 시각장애우들이 길을 찾는데에 도움을 주는 블록이다.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매일 걷던 길에 노란 블록이 사라졌는지 남아있는지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불편함은 우리 사회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모를 뿐'이다. 내 눈에 안 보인 다고 해서 내가 직접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불편함, 어려움, 서러움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김지영 씨와 같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서러움을 공감받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모를 뿐'인 사실을 '없다'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을 상처 준 적은 없는지 가슴 졸이며 내 생각들을 되짚어보게 만드는 불편함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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