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시작할 때 꿈은 크게 가지고 목표는 높게 세우는 거라고,그래야 이루지 못하더라도 더 멀리 갈 수 있는 거라 들어왔는데,결국엔 어딘가 도달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남아서, 나만 매번 무언가 이루지도 못하면서 지난 실패에서 배우지도 못해서는 번번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뭐든 시작하기 전엔, 뭐라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고 먼저 배움을 구했다.
가진 재능은 하찮게 느껴졌지만, 배우는 동안은 조금쯤 발전하는 기분이 들었다.배우는 동안은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약을 준비하는 사람일 수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그래서 늘 '준비 중'이었고, '때가 되면' 시작할 터였다. 그렇지만 그 '때'는 대체 뭘로 가늠할 수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언제나 무엇인가 시작하기엔 아직 부족한,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이왕이면 성공을 꿈꾸라고들 하지만 오직 성공만 꿈꿔지는 게 현실이라서, 행여나 기대치 못한 실패자가 될까 봐 두려운 날들이 많았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어서, 어차피 성공하지 못할 거라면 실패라도 하지 말자는 마음이 시작을 늘 미루게 했다.
글쓰기도 그림 그리기도 좋아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살면서 드는 생각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겨보면 좋겠다, 싶었다.
원래는 노트에 쓰기 시작했는데, 한 권도 살아남은 노트가 없다.이왕이면 그럴듯한 한 권을 완성하고 싶은데, 글이란 지나고 보면 어쩜 그렇게 부끄러운지일기처럼 쓰고도 행여나 누가 보면 어쩌나 마음에 들지 않는 글들을 찢어내고는너덜너덜해진 노트에 애정이 식어 남은 페이지도 채울 맘이 영 들지 않았다.
문득 이걸 써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면, 하다가 중도 포기한 흔적이 남는 건 또 싫어서 남은 글들도 잘게 잘게 찢어 버렸더랬다.그러다 어느 날 새 노트를 다시 열고, 또다시 없애는 일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노트 한 권을 마음에 드는 글과 그림으로만 가득 채우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노트 한 권 분량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준비가 되면 써야지 했다.
그리고 당연히 엄청 오랫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래도 다시 그냥 해봐도 좋겠다는 감각은,
새로운 페이지에 완성된 이야기의 첫 문장을 쓰는 기분이 아니라 쓰던 문장에 쉼표를 찍고 남은 생각을 다듬는 기분으로 시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돌아왔다.
이걸 써서 뭐할 거냐-자체 검열했었는데, 뭐하려고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게 하려던 건데 싶었다.쓰다 보면 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원래 하려던 건 그냥 쓰는 거였으니까.
인생 n막의 간지(間紙)도, 유레카의 순간도, 그 흔한 SNS 기존 계정 삭제 후 새로운 계정 생성도 없이,어제 실패하고 끝난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아직 하고 있더라는 다이어트처럼, 혹은 쉼표 다음에 이어지는 엉뚱한 문장처럼,시작인 건지 아닌 건지 애매모호하게살던 대로 살면서 하고 싶던 것을 슬쩍 얹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
여전히 살면서 '그래서 앞으로 그걸로 뭐할 거냐'는 질문은 계속 받을 테고그 질문에 굳이 대답하려 한다면 그럴듯하게 공격적인 10년짜리 로드맵 정도는 있어야 할 테지만언제쯤 책을 내겠다, 전시를 하겠다, 브랜드를 만든다, 상을 타겠다, 그런 거창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도 우리는 삶의 태도로서 창작을 선택할 수 있다.
인생의 주제가 없어도 오늘의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 87번째 글을 쓰고,1번이 아니라 87번 글에 시작이라는 키워드를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