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소설
선우 선배를 만난 곳은 내가 일하는 카페였다. 그는 검은색 겨울 코트를 팔에 걸쳤고, 그의 머리카락과 눈썹에는 눈이 옅게 쌓여 있었다. 선배의 회색 스웨터는 낡고 팔 부분의 올이 풀려 있었다. 그는 커피를 주문하며 “미술관 관람이 되나요?”라고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금 떨렸다. 카페는 언덕 위에 있어서 차가 없으면 삼십 분을 걸어와야 했다. 미술관 관람을 위해 눈을 맞으며 걸어온 건가 생각하며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펜션 투숙객에게만 개방하고 있습니다.”
카페의 사장은 유명한 동양화가로 펜션과 미술관도 운영했는데, 예전에는 오천 원을 받고 미술관을 모두에게 개방했지만 지금은 펜션 투숙객만 볼 수 있게 했다. 내 거절에도 선우 선배는 고집스럽게 미술관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원래는 안되지만...”
나는 내일 아침 9시에 펜션 투숙객을 모아 미술관 관람을 하니 정 보고 싶으면 그때 오라고 말했다. 선우 선배는 커피를 마시자마자 카페를 떠났다. 나는 펑펑 쏟아지는 눈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통유리창 너머로 오래 보았다. 선우 선배는 목이 두껍고 어깨가 넓고 등이 구부정했다. 마치 수도사의 망토를 느슨하게 걸친 것처럼, 관념이 육체를 걸치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다음 날 아침의 하늘은 푸르렀고, 전날 내린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선우 선배는 아홉시 즈음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왔다. 어째서 택시를 타고 오지 않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의 옷차림에 가난이 묻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관람객은 선우 선배뿐이었다. 우리는 미술관의 둔중한 철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전시실로 들어갔다. 나는 이 설치미술이 암에 걸려 죽음을 마주하게 된 작가의 마음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완쾌했지만 이 작품을 만들 당시에 사장은 암 투병 중이었다. 천장에 나란히 매달아 놓은 화선지들이 바닥의 먹물에 비친 그림자가 꼭 계단처럼 보였다. 나는 늘 하는 질문을 했다.
“저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지만, 선우 선배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여자인 내가 저 안에 있을 것 같아요.”
의외의 대답에 놀란 나에게 그가 물었다.
“큐레이터님의 계단 아래에는 뭐가 있나요?
내가 왜 괴물, 이라고 대답했을까. 그는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관 밖으로 나와 카페로 걸어가는 길에 선우 선배는 내게 그림을 그리냐고 물었다. 내가 취미로 틈틈이 그린다고 하자 미대를 나왔냐고도 물었다. 나는 경제학과를 나왔다고 대답했고 선우 선배가 또 물었다.
”저랑 같이 저녁 먹을래요?”
내가 왜 좋다고 했을까. 가난한 미술 애호가로 보이는 선우 선배의 남성적 매력에 끌린 것일까. 아니면 그의 부끄러운 듯한 미소에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낀 것일까.
다섯 번째 데이트는 선우 씨가 종종 간다는 전통주점에서 했다. 감자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선우 선배는 내가 그린 그림들을 보여달라고 했다. 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다.
”선이 거칠고 색이 강렬하네. 얼굴들이 흘러내리는 건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어느 날 망친 그림을 닦아내고 그 위에 덧칠했더니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 후로 물감을 쓴 후 일부로 닦아내고 디테일을 그려 넣는다고. 나는 막걸리를 훌쩍이며 말했다.
”초등학생 때는 사람들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어.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했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선명해졌지만.“
”지현이는 어릴 때부터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봤구나.“
나는 선우 선배가 나에 대해 하는 말들이 좋았다. 그는 온화하고 관대해 보였다. 나보다 두 살 많았고, 시민단체에서 일했고, 싱어송라이터였다. 유투브로 찾아본 노래는 단조롭고 우울했고 조회수가 158회인 걸 봐서 인기도 없는 것 같았다. 술집에서 나와서 나는 선우 선배의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청소를 안했는데.”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래, 가자. 옥탑방이라 추워.”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문에는 빨간 글씨로 <통제구역>이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농담을 했다. “이 안에 통제 불가능한 무시무시한 뭔가가 살고 있나 봐.” 옥상에선 검은 바다와 불을 밝힌 고깃배가 보였고, 항구 근처의 야트막한 언덕 위로 등대가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옥탑방은 추웠다. 책상 위에는 뿌옇게 먼지가 쌓여 있고, 침대에는 살비듬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고, 변기는 지저분했다. 식탁 위의 코 푼 휴지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내가 말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지 않았으면 당장 도망갔을 거야.” 선우 선배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선배가 만든 김치 오뎅탕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더 마셨다. 제법 취했을 때 선배가 말했다.
“나는 사실 네가 아는 사람이야.”
“응?”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어.”
기억을 더듬었지만 선배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는데.”
“우리는 나름 친했어.”
“난 친한 선배가 없었어. 조용한 편이라 동급생 중에도 친구가 적었어.”
“김선우. 너의 생일 선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줬지.”
나는 김선우를 알았다. 그는 고3이었고 나는 고1이었다. 우리는 백일장 겸 사생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여하며 친해졌다. 우리는 반년 동안 이메일을 교환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김선우는 얼굴선과 어깨선이 부드럽고 목소리가 가냘픈, 호리호리하고 여성스런 남자였다.
“전혀 다른 사람인걸.”
“나는 희귀질환을 갖고 있어. 칼만 증후군이라더군. 남성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병이야.”
선우 선배는 담담하게 자신의 병을 설명했다. 태어났을 때 고환이 콩알처럼 작았다는 것, 부모님은 걱정하면서도 자라면서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 어릴 때부터 길거리에서 자주 여자아이로 착각되었다는 것, 지역 병원에서 검사를 했다가 지금 치료를 받으면 키가 자라지 않으니 스무 살 이후에 치료를 받으라는 말을 들은 것. 선우 선배가 ‘칼만 증후군’이라는 병명을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때 서울의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고 나서다.
“스무 살 때부터 남성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이 년 만에 키가 165에서 183으로 자랐어. 얼굴선이 뚜렷해지고 목소리가 굵어졌지. 밤마다 팔다리가 쑤시고 젖꼭지가 아팠어. 이년 만에 다른 사람이 되었어. 물약을 마신 앨리스처럼.”
나는 납득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뭐가?”
“체셔 고양이 있잖아. 모습을 다 감춘 후에도 허공에 미소는 잠시 남겨두는. 선배의 외모는 달라졌지만 미소는 지금의 얼굴에도 남아있는 것 같아. 그래서 카페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친밀감을 느꼈나 봐.”
“나도 널 다시 봤을 때 무척 행복했어.”
“지금의 선배 모습은 마음에 들어?”
“나쁘지 않아, 남성적인 나.”
나는 선우 선배의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뺨의 감촉이 까끌까끌했다. 선배의 눈매와 입술에 고등학생 때의 얼굴이 남아있었다. 선우 선배와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얘기를 한참 나눴고, 우리가 이 섬에서 다시 만나게 된 우연에 대해서 말했다. 선배는 지역신문에서 나의 전시회에 대한 예전 기사를 본 다음 날 내가 일한다고 쓰여 있는 카페로 무작정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갑자기 연락을 끊은 것 때문에 날 원망하지 않았어?”
선배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내가 첫키스를 한 여자애니까, 당시엔 가슴이 무너졌지. 그런데 네 기사를 발견하고 마냥 설레더라. 이렇게 이십 년이나 지나 다른 장소에서 다른 외모로 다시 너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다니 나는 운이 좋구나, 했지.”
이날 우리는 섹스를 했다. 선우 선배는 손과 입을 이용해서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선우 선배의 음경은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의 작은 음경이 발기한 상태를 유지한 것은 오 초 정도였다. 나는 황홀감과 동시에 슬픔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준혁을 불렀다. 준혁은 나보다 열다섯 살이 어렸고, 우리는 종종 잠자리를 했다. 내 질 안에 손가락을 넣은 준혁은 “왜 이렇게 젖었어?”라고 물었다. “널 생각하며 자위했어.”라고 내가 말했다. 나는 불을 끄자고 했다. 준혁의 음경은 크고 단단했다. 준혁과 몸을 섞으며 나는 내내 선우 선배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나는 정신병원에 두 달 동안 입원했다. 어느 날 저녁, 학교 밖으로 나가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교문을 나서지 못했다. 밤늦게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교문을 지나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 가야 세계가 안 무너질지 몰라서.” 의사는 내게 조울증과 조현병 진단을 내렸고,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입원을 권했다. 다행히 약물치료로 입원 두 달 만에 상태가 좋아졌다. 나는 ‘정신병원에 다녀온 애’로 전교생에 알려졌다. 가끔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아서 교단에 나갈 때면 “아, 쟤가 그 정신이 이상했던 애지.”라는 수군거림을 들었다.
선우 선배와 나는 사생대회 겸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함께 나갔다. 대회가 치러진 장소는 왕릉 깊숙한 곳이어서 입구에서부터 삼십 분 넘게 걸어야 했다. 일학년 여학생이 선우 선배에게 물었다. “오빠는 고 삼인데 왜 백일장에 참석해요?”
“설레는 마음으로 이렇게 근사한 소나무 사이를 걷고, 귀여운 후배들과 조잘거리는 시간이 내년엔 오지 않을 테니까.”
선우 선배는 변성기가 오지 않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의 얼굴은 선이 가늘어서 만약 남자 교복을 입지 않았다면 여자로 오해받을 정도였다. 선배는 여성적인 외모와 시를 써서 종종 상을 받는 걸로 학교에서 유명했다.
나는 담장 밑에 핀 제비꽃을 그렸다. 그림을 마무리하는데, 이미 시를 제출한 선우 선배가 뒤에서 말했다. “파란색이 참 이쁘구나.” 선우 선배는 내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내 옆에 서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선배는 샤갈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릴케의 시를 즐겨 읽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선배는 내게 일주일에 서너 번은 메일을 보냈고, 나는 그보다 적게 답장을 했다. 선배의 메일에는 생활이 거의 담겨있지 않았다. ‘랭보는 세계를 헤맸지만,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의 머릿속을 헤맸지. 사실 둘은 같은 장소를 헤맨 것 같다. 지현아, 내가 헤맬 곳은 어디일까?’ ‘나는 학교라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다. 나와 아무 공통점도 없는 아이들과 함께 하루종일 교실에 갇혀 오직 점수를 위해 온갖 것들을 머리에 집어넣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 있을까’ ‘모아이가 자신의 키보다 더 깊숙이 땅속에 박혀있는 것을 아니? 마음이란 사람보다 더 깊이 뿌리박혀 자라기 마련이다. 언젠가 모아이를 보러 가고 싶구나’ 선배는 수험이 전부인 현실에서 고집스레 눈을 돌려 책과 꿈의 세계를 향했고, 나는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좋았다.
동물원 근처의 미술관에서 샤갈 전을 하고 있으니 보러 가자는 선배의 메일이 온 것은 9월 초였다. 대입 시험을 코앞에 둔 사람이 여유를 부린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러자고 답장을 보냈다. 전철 역 앞에서 만난 선배는 청바지에 남색 남방을 입었고, 나는 청바지에 파란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우리 둘 다 푸른 옷을 입었네. 샤갈이 좋아하겠군.”하고 선배가 여자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샤갈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근사했다. 내가 ‘생일’이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 양반다리로 앉아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선배도 내 옆에 앉았다. “샤갈은 자기 생일에 결혼했어. 저 여자는 샤갈의 부인이지.” “왜 떠 있는 거죠?” “두 사람의 사랑이, 허공으로 떠오를 만큼 강렬하니까. 그런데 둘의 사랑은 차이가 있어. 샤갈은 완전히 떠 있고, 부인은 바닥에서 뜰락말락하잖아. 부인의 눈을 봐.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흡뜨고 있잖아? 자신이 받은 사랑에 놀란 것처럼. 반면에 샤갈의 눈은 푸르게 번져있어. 몽상에 빠진 눈이지. 허공에 뜬 채로 고개를 기이하게 비틀어 부인에게 입맞춤하잖아. 불편을 감수할 만큼 부인을 사랑하는 거야.”
나는 선우 선배의 말에 반했다. 나는 어렸고, 내게 주어진 한 가지 세상은 너무 좁았다. 키가 자라고 있었고, 다 자라서 어느 장소에 다다를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주어질 세계의 넓이를 가늠하며 황홀해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이 된 후의 삶이 초라할까 두려웠다. 선우 선배가 보여주는 세계는 별나고 아름답고 재밌었다. 어쩌면 나는 선우 선배가 아니라 그가 볼 수 있는 세계의 높이에 반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미술관을 빠져나와 동물원에 가는 리프트에 나란히 앉았다. 발밑으로는 검은 호수가 있었고, 호수 너머의 놀이공원에서 사람들의 함성이 희미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리프트는 아찔할 정도로 높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렸다. 저 아래 초록색 그물망은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그 위에 떨어지면 바로 찢어질 것 같았다. 그물망 위에는 하트 모양 풍선이 달린 머리띠, 어린이용 운동화 한 짝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분실주의: 유실물은 되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표지판을 가리키며 선배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뭘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샤갈 전을 봤기 때문인지, 선배에게서 나는 산뜻한 샴푸 냄새 때문인지, 나는 아찔한 흥분감을 느꼈다. 리프트는 어느새 숲 위를 지나고 있었고, 숲의 가장자리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나치게 흥분할 때는 나는 사물에서 윤슬처럼 빛이 반짝거리는 걸 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한다는 걸 중학생이 되어 알았다. 나는 리프트가 나를 이제껏 가본 적이 없는 장소로 데려갈 것을, 리프트에서 내리면 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예감했다. 선배가 가방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꺼내 나에게 줬을 때-다음 날이 내 생일이었다- 나는 물었다.
“선우 선배, 나 좋아해요?”
선배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지현이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럼 키스해줄래요?”
신발들이 허공에서 흔들거렸고, 내 첫키스에선 귤 냄새가 났다. 리프트가 멈춘 것은 그 직후다. 우리는 허공에서 기다렸다. 사고가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선배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하고 날 안심시켰다. 바람이 불자 동물의 배설물 냄새가 풍겼고 쌀쌀해졌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어느새 사그라들었다. 삼십 분 후에 우리는 리프트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어떤 여자아이가 리프트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다. 땅바닥에 발을 딛은 나는 선배가 못생긴 여자처럼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키가 작고 어깨는 가냘프고 목소리는 새처럼 높다는 걸. 우리는 동물을 보지 않고 동물원을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선배의 이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고2로 올라가면서 미술을 그만두고 수험에 전념했고, 원하는 대학의 경제학부에 들어갔다. 대학 4학년 때 나는 또 정신이 이상해져서 스스로의 의지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미술치료 시간에 붓을 다시 잡았다. 나는 에메랄드 그린 색의 하늘에서 한 여자아이가 반쯤 망가진 우산을 잡고 날아다니는 수채화를 그렸는데, 미술치료 강사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그림이네요. 미대생인가요?”라고 물었다.
그 후로 미술강사에게 도구를 빌려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그리는 순간에는 내가 있는 곳이 정신병원이라는 걸 잊었다. 이곳의 삶은 락스에 담갔다 뺀 것처럼 강박적으로 하얗고 소독약 냄새가 났다. 나랑 같은 방을 쓰는 환자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자신의 손목을 커터칼로 그었던 여고생인데 하루종일 흐느껴 울었고, 다른 한 명은 50대 아주머니인데 국가가 자신의 뇌에 뭔가를 심어놓았다고 주장했다. 만약 내가 에메랄드 블루와 프러시안 블루로 하늘을 칠할 수 없었다면 그들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계속 그림을 그렸고 하늘에 떠 있는 대상은 매번 바뀌었다. 개, 코끼리, 책, 해골, 의자... 그림을 그릴 때면 머릿속에서 별똥별들이 스윽슥 떨어졌다.
입원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때 나는 환자들이 울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아,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이란 게 있구나. 누구일까,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마음을 달아놓은 이는? 뜨거운 촛농처럼 흘러내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살짝 굳은 것처럼 윤곽선을 가졌다.
퇴원한 후 나는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느 화가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섬으로 간 것은 서른한 살 때였다. 섬에선 바다와 하늘의 색이 더 선명할 것 같았다. 나는 최저시급을 주는 직장들에서 일하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카페나 작은 규모의 갤러리에서 종종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관광객인 아주머니가 ‘귤의 색감이 좋다’라며 하귤나무 정원을 그린 6호 크기의 그림을 이십만 원에 사간 적도 있다. 가끔 지역 신문에 내 기사가 실렸다.
미술관과 펜션을 겸한 카페에서 일한 지는 이 년째이고, 이제 나는 서른아홉이다. 사장은 사람들에게 나를 “이 친구는 여기 직원이면서 지역 화가예요.”라고 소개하며 자랑스러워한다. 휴일에는 장애인이 모여 사는 시설에서 봉사를 했다. ‘슐런’이나 ‘보치아’ 같은 장애인 운동을 가르치는 것이 내 일이다. 준혁은 무척 잘생겼고 지능은 낮다. 처음 드라이브를 한 날 그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큐가 81이예요. 그래서 공익 판정을 받았어요.”
“생활이 불편한가요?”
“신발끈을 묶어도 자꾸 풀리고, 아무리 공부해도 학교 수업을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준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보조석에 앉은 그의 희고 섬세한 얼굴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준혁 씨는 여자들에게 인기 많을 것 같은데요?”
“여자들도 처음엔 먼저 다가와도, 나중엔 말이 안 통한다며 떠나요.”
말이 안 통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몇 번의 데이트를 더 하며 알게 되었다. 준혁과 나는 함께 오름에 오른 적이 있는데, 하늘이 맑아서 정상에서 보는 전망이 좋았다. 초록의 무밭과 곳곳에 세워진 새하얀 풍력 발전기, 흔들리는 갈대숲. “정말 아름답네요.”라고 내가 말하자 준혁은 “그래요? 나는 사실 뭐가 아름다운지 모르겠어요.”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발달 장애인들도 산이나 바다에 가면 지루해 하더라고요. 차라리 그네를 타는 걸 더 좋아하지. 어쩌면 지능이 낮으면 풍경을 봐도 좋아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나는 준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오름에서 내려와 차 안에서 말했다.
“아이들이나 발달 장애인들은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잖아요. 풍경을 감상하는 능력은 자신의 죽음을 믿으며 생기는 게 아닐까요. 준혁 씨가 죽은 다음 날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봐요.”
“내가 죽은 다음 날 아침? 그런 생각은 안해봤어요.”
“나이를 먹으면 어느 순간부터 현실의 풍경에 자신이 죽은 이후의 풍경을 겹쳐 보는 것 같아요. 나 역시 죽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그리고 싶어요.”
준혁은 어딘지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지현 씨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몰라도 괜찮아요.”
“제가 실망스럽지 않아요?”
“준혁 씨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얼굴도 아름답고, 다정하고 솔직하고. 그러니 장애인들이 늘 준혁 씨를 쫓아다니죠.”
이날 저녁 우리는 잤다. 준혁과의 섹스는 무척 기분 좋았다. 그가 전에 만난 연상의 여자들에게 배웠다는 테크닉이 절륜했다. 우리의 관계는 일 년이나 이어졌는데, 그는 점점 과격해져서 내게 욕설을 뱉고 엉덩이를 때리고 목을 졸랐다. 나는 굴종하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러다 선우 선배를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선배가 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간직했어. 존 테니얼의 삽화가 마음에 들었거든.”
선배의 옥탑방은 너무 추워서 우리는 발가벗은 채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림대회 상을 받으러 교단에 올라간 지현이를 보고 앨리스를 떠올렸어. 두리번거리며 당황하는 게 상을 받는 게 아니라 재판을 받는 여자아이 같았어. 친구가 네가 정신병원에 다녀온 애라고 알려줘서, 그때부터 너를 동경했지.”
“정신병원에 다녀온 애라서?”
“예뻐서.”
나는 짧게 웃었다.
“신기해. 선배가 내게 준 책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게.”
“뭐가?”
“선배의 변화를 예언하는 것 같아서. 케이크를 먹고 앨리스의 키가 삼 미터로 늘어나잖아. 목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괴물처럼 보이는 앨리스 그림이 기억나. 갑자기 외모가 변해서 혼란스러웠어?”
“그렇진 않아. 어떤 몸이든 나는 나니까. 그리고 키도 크고 남자다워져서 여자들이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서 좋았어.”
“어릴 때 인형과 분홍색을 좋아했어?”
“아니. 총싸움과 로봇에도 흥미가 없었고. 벽장 속에 틀어박혀 공상을 하는 걸 좋아했지.”
선배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여성 호르몬은 타인과 연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것과 관련있잖아? 그래서인지 난 어릴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모임을 조직하는 걸 좋아했어. 대학생 때는 늘 학생운동을 했고, 지금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야.”
“지금 삶에 만족해?”
“아니, 모든 게 내 생각 같진 않아.”
선배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했고, 이상과도 달랐다.
“시민단체에서 하는 일은 기껏해야 후원자에게 전화를 걸어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계좌번호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 정도야. 지겨운 일이지...”
선배는 대학생 때 받은 학자금 대출을 아직 갚는데, 이자가 매달 5만원 가까이 나온다고 했다. 선배의 부모는 기초 수급자이고, 시민단체의 월급은 말도 안되게 낮았다. 선배는 자주 우울해졌다. “멀리 떠나고 싶어서 제주도까지 왔는데, 왜 아직도 골방에 처박혀 있는 걸까.” 선배는 통풍이 일 년마다 찾아와서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낀다고, 그렇지만 무엇보다 선배를 괴롭힌 건 여자들이라고 했다. 마치 사춘기 소녀가 로맨스를 끝없이 동경하듯, 선배는 사랑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여자에게 반했다. “하지만 내가 반한 여자가 날 좋아한 경우는 거의 없었어. 얼마 전에 술을 같이 마신 여자가 그러더군. 내가 너무 가난한 것 같아서 싫다고.”
나는 선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여자들은 안목이 없는 거야. 선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선배는 화장실에 다녀와 이불 속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지현이는 만약 다른 사람 만나고 싶으면 만나도 돼.”
나는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었다. 선배도 혹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은 거냐고. 선배는 그런 건 아니라고, 자신은 두 명의 여자를 만나기엔 돈도 시간도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넌 그래도 돼.”
나는 선배에게서 몸을 뗐다.
“왜?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선배를 기쁘게 해?”
“딱히 기쁘진 않아. 싫지 않을 뿐이야.”
선배는 대학생 때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귄 동료 학원강사 얘기를 했다. 그 여자는 무척 예쁘고 글래머였고 남자가 많았다. 어느 날 취한 채로 그를 만나러 왔는데, 젖꼭지 옆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다.
“다른 남자와 하고 씻지도 않고 온 거야. 정말 귀여웠어.”
선우 선배는 그 장면이 생생하다는 듯 쿡쿡 웃었다. 선배의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는 선배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있지, 나는 이미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어.”
“그래? 어떤 사람이니?”
선배는 온화한 태도로 물었고 나는 준혁에 대해 말했다. 지능이 낮은 편이고, 얼굴선이 아름답고, 섹스를 잘한다고. 선우 선배는 얼마나 잘하냐고 물었다.
“지금껏 해본 남자들 중에 최고야.”
“어떻게 하는 걸까? 나도 지현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동영상 있는데.”
“나 볼래.”
“아, 안돼.”
“볼래, 볼래.”
선배가 내 겨드랑이를 간질거렸다. 나는 킥킥 웃으며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재생했다. 선배가 날 뒤에서 안은 채로 우리는 함께 동영상을 보았다. 욕설, 음란한 말들, 엉덩이를 때리고 목을 조르는 장면이 3분 정도 이어졌다.
“우리 지현이는 거칠게 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나도 그렇게 할까?”
“아니, 선배하고는 부드럽고 다정한 섹스만 하고 싶어. 그런데 다른 남자와 하는 걸 보니 싫지 않아?”
선우 선배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금은 네가 내 옆에 있잖아. 다른 사람 옆에 있더라도 네가 행복하면 돼. 언제든 내게 다시 와주기만 한다면.”
그 목소리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나는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을 말했다. 내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이십 년 가까이 숨겨온 어둡고 지저분한 비밀이었다. 그 비밀은 내 밖으로 나와 세상의 빛을 충분히 받고서 선배의 마음으로 옮겨갔다. 그 과정에서 청결해졌다.
“괜찮았니, 혹시 그 일 때문에 힘들진 않았니.”
선배는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이해했다. 죽기 직전의 정신이 오락가락한 늙은 나부터, 막 태어나 울부짖는 아기인 나까지 모든 시기의 나를 동시에 이해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선배의 정수리에서 빛이 은은히 뿜어져 나왔고, 선배의 얼굴선이 흘러내렸다. 그날 나는 선배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말했고, 선배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아이처럼 잠을 미루면서까지 계속 지껄이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그 후로 나는 선우 선배에게 집착했다. 선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매일 차를 끌고 선배의 집을 찾았고, 나를 정말 좋아하냐고 수없이 물었다. 나는 선우 선배의 흘러내리는 얼굴을 마흔여덞 개의 화폭에 담았다. 나는 그에게 온갖 것을 선물했다. 스웨터와 바지, 가방, 지갑... 모두 브랜드 제품이었다. 데이트 비용도 모두 내가 냈다. 선배가 커피값이라도 내려고 하면 나는 “선배는 빚이 있으니까.”라는 말로 막았다. 선배는 어깨를 으쓱하며 “지현이 좋을 대로 해.”라고 말했다. 언젠가부터는 자기가 내겠다는 말도 안했다.
직장에서 나는 실수를 많이 했다. 예약을 오버부킹시키고, 투숙객을 다른 방으로 안내하고, 아메리카노를 시킨 손님에게 카페라떼를 가져다줬다. 동료 직원들은 내가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했다. 선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별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선배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선배를 만나지 않을 때면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렸다. 선배는 정말로 이 세상에 부피를 갖고 존재하는 사람일까? 나는 매일 선배에게 백 개가 넘는 카톡을 보냈고, 자주 전화를 했다. 선배는 불평을 하진 않았지만, 어느 날 내가 13번째로 전화를 걸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현이가... 이런 줄 몰랐어.”
선배와 만나고 두 달 정도 되는 날, 준혁이 내 방에 왔을 때 나는 그의 예쁜 얼굴도, 그가 제공하는 쾌락도 더는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간에 나는 선배를 만나야 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섹스 후에 내가 말하자 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사실은 내게도 정말로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 어떤 여자냐고 묻자 준혁이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지능이 낮은 여자.” 준혁이 떠나자마자 나는 자석에 끌리듯 선배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갔다. 차 안에서 전화로 준혁과 헤어졌다고 하자 선배가 말했다. “그냥 만나도 괜찮은데, 왜 헤어졌니.”
선배의 집으로 올라가는 철문에 붙은 <통제구역> 팻말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였다. 그 문을 열면 선배의 옥탑방이 사라지고 없을 것 같았다. 선배도 사라졌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철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무서운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면 안 된다! 차로 돌아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바로 앞이라고 했는데 왜 오지 않냐고 선배가 물었다. 내가 집에 가는 중이라고 하니까 왜냐고 또 물었다. 나는 제논의 법칙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거북이가 잡힌다면 아킬레우스는 더는 쫓아가지 않겠지. 만약 거북이가 잡히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쫓을 거야. 나는 선배에게 무한히 다가가고 싶어.”
선우 선배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나는 내가 병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건 마음을 병적인 상태에 두는 걸 허용하는 일이 아닌가. 오히려 병의 깊어짐을 즐기는 마음이 아닌가. 그런데 어디까지가 병이고 어디까지가 내 마음인 걸까.
어느 날 나는 선배를 껴안고 울면서 물었다.
“저기, 나 정신병자 같지 않아?”
그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에 족쇄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지.”
나는 선배의 목에 매달렸다.
“선배의 빚 천만 원, 내가 빌려줄까?”
“응? 지현이가 그럴 돈이 있니?”
“이자 내기 힘들다고 했잖아. 무이자로 빌려줄게. 오 년 후에 갚아.”
그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사흘 후 선배는 돈을 빌리고 싶다고 카톡을 보냈고, 나는 바로 천만 원을 계좌 이체했다. 내 통장의 잔고는 72만원이 남았다. 나는 선배에게 카톡을 보냈다. ’돈을 빌려주는 조건은 하나야. 세상에 대한 채무 의식을 갖지 말 것‘
그날 저녁 나는 선배를 껴안고 같이 살자고 말했다. 월세는 내가 내겠다고, 이번 달 말에 그의 집으로 이사 가겠다고 했다. “선배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선배의 살냄새를 맡으며 아침에 깨고 싶어.”
선우 선배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작곡 공모전에 집중해야 돼. 일주일 동안 전화도 힘들고 만나지도 못할 것 같아.”
나중에 나는 그렇게 말하던 선배의 목소리를 자주 되새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우린 드문드문 카톡으로 연락했고 그동안 나는 머리카락을 잔뜩 뽑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아침 7시에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는 음성 안내가 나왔다. 나는 차를 몰아 선배의 집으로 갔다.
옥탑방은 짐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다. 현관 매트가 있던 자리에는 노트를 뜯어 쓴 메모가 있었다. 여자가 쓴 것처럼 동글동글한 손글씨였다. 메모 위에는 모아이 석상 마그넷이 놓여 있었다.
나는 모아이를 보러 떠난다. 허공을 바라보다 허공이 되어버린 눈동자를, 돌로 굳어버린 텅 빈 마음을 보고 싶다.
마그넷은 지현이의 이른 생일 선물이야. 볼 때마다 나를 떠올려줘. 우리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내가 떠났음을 알아줘.
나는 모아이 마그넷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중국제로 색상이나 만듦새가 조악했다. 그러나 선배의 소중한 꿈의 한 조각이었다. 나는 모아이 마그넷을 가슴에 대었다. 선우 선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떠난 곳이 이스턴 섬이든 어디든. 빌려준 천만 원도 모아이의 눈동자에 담긴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텅 빈 옥탑방에서 삼십 분 정도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자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차에서 그림 도구를 가져와 옥탑방의 바다가 보이는 창문 앞에 앉아 붓질을 시작했다. 바다는 눈부시게 파랬다. 내가 그린 것은 빛, 무수한 빛이다. 빛의 푸른 알갱이들을 그리는 동안 머릿속의 안개가 사라지고 사물들의 얼굴이 섬처럼 솟아 올랐다. 선배를 배신한 건 매번 너라고 빛 알갱이 하나가 속삭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