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여군 93기이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by 백소영

“93기 전원 집합!!!”

학생장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각자 자기 침대 앞에 점호 자세를 취하고 섰다.

‘또 시작이네,’ 나는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길 바랐다.

선임하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오늘 유난히 필 받은 듯 높다. 얼차려 시작이다.

모두 내무반 양쪽 침대 끝으로 모여!

한 명씩 침대 아래로 낮은 포복 실시!

‘헉,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전투복을 입은 우리는 내일 있을 복장점검을 위해 세탁하고 다리고 잔뜩 준비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침대 밑으로 포복을? 침대 밑에는 개인 세수 대야와 신발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거길 기어가라고?

"뭐 하나, 실시 "

라는 소리에 번호 순대로 동기들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쌕쌕 숨소리를 내고, 누군가는 실실 어이없는 이 상황을 웃어넘기려 했고, 또 누군가는(아마 나였겠지) 별별 얼차려를 만든다고 고생이 많은 선임하사가 마냥 밉기만 했다. 일순간 27명 동기들이 양방향에서 침대 밑을 기어 나와 순서대로 선 다음 다들 웃음을 참지 못 했다. 그건 우리 앞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엄숙해야만 하는 선임하사도 그때만큼은 웃음을 참지 못 해 크크크 하는 소리도 들렸다.


동기들 전투복은 먼지 누더기가 되었고, 매일 청소한다고는 했으나 바쁜 시간에 침대 아래까지 꼼꼼히 할리 없는 상황이 여실히 우리 옷으로 검증되었다. 우리들의 얼굴은 더 누더기가 된 것은 말해 뭐해다. 그때 누군가의 전투복 단추 하나가 또르르 굴러 선임하사 앞으로 갔다. 지금은 전투복이 지퍼지만 1987년 여군 전투복은 단추였다. 힘을 주어 포복을 하다 보니 실밥이 풀려 단추가 떨어졌다. 제발 그 앞에서만은 멈추지 말아 달라는 소리 없는 동기들의 아우성을 그 단추는 무시하고 초임 하사처럼 군기가 빠짝 든 모양으로 그 앞에서 멈췄다. 아, 이 상황을 대체 어찌 수습할 것인가 말이다. 시간아 빨리 가라, 제발 빨리 가렴하고 외치는 수밖에.


상황이 종료되고 선임하사는 나갔지만, 그때 동기들은 힘들었지만 웃음이 나왔고 그 웃음을 참지 못해 시끄럽다고 혼이 났지만 또 웃었다. 동기들은 그렇게 하나의 일로 하나가 되어갔다.

우리 가족들에겐 때때로 읊어대어 딸은 지겹다고까지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몸과 맘이 부르르 사시나무 떨듯 경기를 한다. 자발적이 아닌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버지의 권유와 강요로 딸 넷의 둘째인 나는 여군 하사로 지원하여 용산에 있는 여군 훈련소에 입소(지금은 여군 훈련소가 없고 병과 별로 여군을 모집하여 훈련)하였다.


5개월의 훈련이 끝나면 각 부대로 흩어져 주어진 임무를 해야 한다. 나는 이후 여군 헌병으로 뽑혀 동기 1명과 3년을 육군본부 헌병대에서 근무했다. 대한민국 여군 헌병(지금은 군사경찰)은 20여 명이라 군 장성보다 희귀하여 어딜 가든 주목을 받는 눈에 띄는 존재였다. 친구들은 대학 갈 때 자의 반 타의 반 도망치듯 군에 와 남들 눈에 띄는 게 너무나 힘든 20대 초였는데,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질 않았던 시기였다. 이제는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쓰고 있으니 참 인생은 살아 볼 일이다.


입소 후 첫날은 입고 온 사복을 벗어 부모님께 보낼 한 통의 편지와 함께 집으로 보낼 박스에 담고, 나눠 준 일상복과 군복, 생필품과 여러 군용품을 지급받았다. 너무나 생소했고 전국에서 모인 동기들은 너무나 더 낯설었다. 동기라는 이름으로 뭉친 우리들이 어떻게 친해지고 끈끈해지는지는 정말 눈물겹다. 매일매일 새로운 일이고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일, 앞으로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 그리고 원치 않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가족과 친구들이 다 자는 시간 k1소총을 들고 순찰을 한다든지, 아침 4시 반에 기상하여 청소를 하고, 취사병이 쪄서 주는 비닐봉지에 든(울퉁불퉁하여 원래 모양이 둥근지는 임관하여 제대로 먹어 본 이후 알았다.)

빵을 딸기 잼과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일이라든지, 특전사 파견 부사관에게 혼나가며 태권도, 합기도를 배운다든지, 어쨌든 우리는 원치 않은 일과표에 의해 원하는 것처럼 열심히 해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러지 않으면 얼차려와, 급수에 도달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괴롭? 이는 훈련과 일과에 진을 빼야 했다. 피할 수 없음 즐겨야 하는 것은 사회든 군대든 마찬가지다. 혼자가 아니라 동기들이 있어 가능했던 그 시절, 어떤 어려움도 웃고 울며 함께여서 견뎠다.

이후 동기들은 무사히 예하부대로 흩어져 열심히 청춘의 군생활을 했다, 아무나 경험할 수 없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기 모임에서 밤을 새우고 나누는 우리들의 화양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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