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연에 대하여

by 백소영

책연에 대하여

책과 나는 묘하게 질긴 사이다. 그냥 친구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된다.

인연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으니 거의 뭐… 전생의 채무관계 아닐까 싶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땐 솔직히 책보다 분식집 떡볶이가 더 매력적이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학교 매점 앞에서 인생을 배웠고, 책을 사기보단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먼저였다.

스무 살에 여군이 되면서 책과의 재회. 제복을 입는 여군, 말이 멋있지, 내무반 생활은 기본 옵션이 감시와 간섭이다.


웃어도 혼나고 울어도 혼나는 분위기 속에서,

책은 그나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봐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책 읽다가 실실 웃으면 "왜? 뭐 재밌는 거 있어?"

울고 있으면 "힘들어? 힘들면 그만둬!"

그럴 땐 얼른 책을 앞으로 들이민다.

"이거요, 이 책이요, 너무 슬퍼서요…"

그러면 다행히 혼나지는 않는다.


그렇게 책을 방패 삼아 살았다. 웃고 울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책은 내 인생의 반창고였다.

깨지고, 찢기고, 뒤틀릴 때마다 한 장씩 붙여가며 버텼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큰 성과도 없고, 화려한 결실도 없지만,

“어디 가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책 덕분이다.

그리고 솔직히, 책은 현실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이상적인 친구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들어준다.

무거운 얘기도 가능하고, 아무 말 대잔치도 가능하다.

심지어 내 기분 따라 골라 만날 수 있다.

"오늘은 좀 설레고 싶어" → 로맨스.

"세상에 화가 나!" → 사회비판 에세이.

"머리 좀 식히자" → 만화책.

이쯤 되면 책은 연인, 친구, 심리상담사, 인생 코치까지

다 해먹고 있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월 구독료도 없고, 구속도 없다. 단지 내가 펼치기만 하면 된다.


독서는 내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확실한 위로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도서관에 간다.

딱히 뭘 찾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거기 가면 마음이 편하고 뭐든 상상하고 생각한다. 마치 다 이룬 사람처럼.

책 사이를 거닐다 보면 ‘내가 좀 괜찮아 보이는 착각’이 들고,

그 착각에 즐거운 하루를 살아가게 한다.

책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쯤 ‘감정 조절 실패 전문가’나 ‘세상 탓 전문 유튜버’가 되어 있었을지도.

그러니 다행이다.

나는 책을 택했고,

책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버릴까 봐 무섭긴 하다. 이제는 내가 더 집착 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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