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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Jul 10. 2016

추억에 대한 주권이 사라졌다

아날로그가 그립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동안 페이스북 프로필은 ‘연애 중’이었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연인과 함께였다. 핸드폰에는 커플을 위한 애플리케이션인 ‘비트윈’을 깔았다. 둘만의 대화와 사진들이 쌓여갔다. 그러다가 노을이 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많이 들어봤겠지만, 나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그의 성격은, 이별의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4차원이 매력이었다가,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든 것. 점 하나만 찍으면 ‘님’도 ‘남’이 된다던 말, 노랫말이 아니라 내 얘기였다. 돌아서고 나니 관계를 정리해야겠는데, 디지털 흔적이 내 발목을 잡았다.     


우선 ‘비트윈’을 탈퇴하려고 했다. 그런데 계정을 탈퇴하려면 그놈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늘 ‘자동 로그인’으로만 접속했던 나는 비밀번호를 잊어버렸고, 계정을 탈퇴할 수도 없었다. 다음은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연애 중’이란 팻말을 내렸다. 이젠 휴대폰 사진첩 차례. 오! 사진첩만 지운다고 끝이 아니었다. 자동 백업 설정이 되어 있는 ‘아이 클라우드’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사진을 지웠다. 내가 저런 서비스에 동의한 적이 있었나? 어쨌든 내게 두 번이나 추억을 강제로 소환해준 애플에 경의를 표하며…. ‘비트윈’의 비밀번호를 힘겹게 찾아낸 뒤에야 계정을 끊을 수 있었다.      


드디어 다 지웠다. 후폭풍이 왔다. 추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은 나와 스마트한 디지털 기기와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됐다. 몰래 추억만 보고 싶은 나와 상대방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디지털 기기와의 싸움에서 나는 항상 졌다. 디지털 시대는 한 마을처럼 연결되어있었다. 파도파도 끊임없이 나왔다. 구글에 나오는 그와의 사진에 ‘삭제신청’을 일일이 눌러야했다. SNS에 올릴 때 쉽게 올렸는데, 이 기록들이 무섭게 다가올 줄 몰랐다. 지우다보니 한 번에 디지털 기록을 없애준다는 배너광고가 창 옆으로 떴다.      


추억을 지우려면 돈을 내야한다. 손편지와 사진들을 불태우기만 했던 아날로그 시대가 꿈처럼 다가왔다. 디지털 시대는 내가 쌓은 추억들이 돈이 되는 시대다. 페이스북만 봐도 ‘일년 전 오늘’ 에 대한 미끼로 SNS로 사람을 부른다. 학창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싸이월드가 없어진 이유는, 사업이 망해서였다. 백업 안내만 급히 하고 사라져버렸다. 디지털 시대, 추억에 대한 주권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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