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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Feb 11. 2019

사람으로 생긴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는 거야

우리 가족이랑 8년을 같이 살았더니 이제는 얘가 내가 뭘 원하는지 빠삭하게 알더라고!  서로 말이 통하는 기분이야.


선생님, 강아지가 몇 살이에요?


11살이야


사랑스러운 요크셔테리아가 3년은 누구와 살았을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문화해설사로 일하시는 선생님은 진짜 어른이 뭔지 느끼게 해주시는 분이었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하시고,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셨다. 선생님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에 대한 배려심은 연륜만큼 쌓인다고 느꼈다.    


선생님과 닮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던 내게 갑자기 아드님 연애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드님 내외를 선생님이 소개시켜주셨다고 했다. 저녁 취미를 배우는 프로그램에서 며느님을 만나셨다고 하셨다. 어르신들 사이에 젊은 여자분이 있으니, 주변 아주머니들이 좋은 남자를 소개를 해주고 싶어하는 분위기였다고 하셨다.   


울산의 결혼적령기 여자들의 삶이 그렇다. 정말 어디서나 소개를 받을 수 있다. 


문화센터 내에서 결혼적령기의 아드님을 가진 선생님이 발견됐다. 자리를 만들라고 어찌나 성화였는지 여러번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부담감을 뭉개버릴만큼의 성화에 결국 자리를 만드셨다고 했다. 자리를 만드실 때도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우리 애가 부족한 게 많은데...


부담스러웠던 첫만남이 끝나고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네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아들의 의중을 살피셨다. 지켜보니 두 어번 더 만나는 분위기라 안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드님과 며느님이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며느님을 만나러갈 때면 온 가족이 알 정도였다고 했다. 생전 샤워를 안하던 아들이 씻고, 옷 입고, 왁스를 발랐다고 했다. 그렇게 1년을 연애하다가 결혼했다는 이야기. 


지금은 며느님이 임신을 하셨다고 했다. 시아버지가 임신한 며느리를 태우고 운전을 하는데, 모르고 턱을 밟아 덜컹했다고 했다. 아들이 덜컹 한 번 한 거 가지고, 애가 떨어진 것처럼 호들갑을 피워서 서운했다고 하셨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둘이 알콩달콩 잘 사는 거 같아 보기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요크셔테리아 앞에서는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고 두 손을 꼭 쥐셨다. 알고봤더니 아드님은 진득하게 C.C를 하셨다. 캠퍼스에서 요크셔테리아를 함께 키우다가 졸업할 때 그만 헤어져버렸다. 구여친을 자꾸 생각나게 하는 요크셔테리아를 어찌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께 떠맡기고 집을 떠났다.


그 이후로 아들은 11년간 연애를 하지 않았다. 첫 연애의 상처가 어찌나 깊게 남았는지 옆에서 지켜보기 아쉬울 정도였다고 하셨다. 아들의 첫사랑이 담긴 요크셔테리아를 선생님은 열심히 키우셨다. 매일 산책도 나가고, 간식도 챙겨주면서. 열심히 키우셨는데 서열1위는 아들, 서열2위는 사모님, 서열3위는 선생님...


사람으로 생긴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해야 하는구나


아들이 며느님을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신단다. 옛날부터 말에서 말로 전해오던 저 말이 자꾸만 생각나신다고 했다. 사람으로 생긴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는 수밖에 없구나. 


사실, 사람으로 생긴 상처를 어떻게 사람으로 치유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한테 상처를 많이 받으면 그만큼 사람이 무서워지지 않을까. 아드님도 사람이 무서웠기 때문에 11년간이나 연애를 하지 않으셨던 게 아닐까. 


나도 5년간 만난 사람이 있었다. 연애는 나의 많은 모습들을 바꾸었다. 연락을 잘 안하던 나를 휴대폰을 잡고 사는 사람으로 바꾼 게 가장 컸다. 친구들은 아직도 그에게 고마워한다. 사회성을 만들어준 사람이라면서.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좋아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많이 좋아했다. 어린 애기가 엄마를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니듯. 엄마닭과 병아리  연애를 하면서 쓴 글도 많다. 연애를 하면서 쓴 글들은 감수성이 예민해져서인지 하나같이 공모전이나 매체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돌아왔었다. 헤어지고 나니 글쓰는 능력이 퇴화됐다. 연애하면서 소설 하나 쓸 걸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이 이별을 고하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봄볕같은 사람이 갑자기 한파처럼 변한 게 충격적이었다. 사람은 한순간에 변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셀 수 없이 서러웠다. 나는 아직 많이 좋아하는데


이별과정은 찌질했다. 변한 사람한테 끊임없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곁을 맴돌았다. 차단당했다 


5년의 반이 지나서야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20-25 연애/27.5까지 암흑기/27.5~28.2~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을 깊게 만날 수는 없었다. 25살 이후의 연애는 항상 1달과 3개월 사이를 오간다. 


그래서 나에게 사람으로 생긴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말이 와닿았나보다. 사람으로 생긴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려고 열심히 사람을 만났는데 상처가 더 파였다. 더 만나보면 선생님 아드님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나...? 다시 좋은 사람을 만나서 글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선생님은 요크셔테리아의 비밀을 대나무숲에 외치고 싶다고 하셨다. 아직 며느님이 요크셔테리아의 비밀을 모른다고 하셨다. 온 가족이 손을 꼭 잡고 이것만큼은 평생 비밀로 하자고 약속했다고 하셨다. 현실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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