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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Feb 18. 2019

사람 좋아하는 이야기

첫사랑은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났다.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었던 것처럼 그렇게 만났다. 짝사랑을 오래했고, 짝사랑이 성공했기 때문에 꿈꾸는 것 같았다. 만나면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가거나, 별을 보러갔다. 20대 초반에 맞는 자연스럽고 낭만적인 연애를 추구했다. 연애를 거치면서 낭만적인 연애관은 현실적인 연애관으로 바뀌었다. 서로 좋아 죽겠는 것도 한 순간이고, 초반에 아무리 결혼 얘기를 해도 실현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또 헤어지면서 받은 상처는 나를 극단적 비관주의자+냉소주의로 만들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 만나도 결국에는 끝난다는 냉소주의는 나를 금사빠로 만들었다. 헤어지고 나서부터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잡았다. 정주고 마음주는 게 아니라, 마음주고 정주는 방식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또 첫사랑과 비슷한 스타일보다는 반대 스타일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헤어지고 나서는 낭만적인 연애관을 아직 버리지 못해서 여행을 가서 사람을 만났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국문과에 대해 낭만이 있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첫사랑과 다른 스타일이라서 좋았다. 그 사람과는 여행이 끝나고 현실에서 만났다. 현실은 콩깍지를 빼고 그를 현실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두 번째에는 독서모임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인도 여행을 하고 시를 쓰던 그는 

밤만 되면 사람이 천박하게 변했다. 글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 없다지만, 그는 너무 심했다. 낮과 밤에 사람이 너무 달라보였다. 밤만 되면 글은 내팽개쳤다.      


울산에 와서는 낭만적인 연애관을 더 버렸다. 주변에 소개팅을 구걸했다. 어떤 사람이 좋냐고 물어보는 주선자에게 연상이면 아무나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서 연상과 소개팅을 시작했다.      


처음 소개팅을 한 사람은 친구 남자친구의 절친이었다. 절친분은 허언증이 있었다. 추석 때 사촌동생과 경상남도 자전거 여행을 갈 거라길래 그런 줄 알고있었는데, 추석 때 그분은 자전거 여행을 간다는 사실조차 까먹으셨다. 자전거 여행 말고도 온갖 거짓말들이 난무했다. 자취를 해서 달마시안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듣고 그와 만나는 걸 그만뒀다. 그는 산책을 얼마나 해야하는지에 대한 계획도 없었고, 동물을 키우는 데에 필요한 책임감도 없었다.     


두 번째는 학교 언니가 세 명을 동시에 소개시켜줬다. 이십대 후반의 연애는 이런 거라면서 세 명을 소개받아보라고 했다. 저절로 밀당이 된다고 귀띔해줬다. 못된 짓인 걸 알면서도 세 명을 소개받았다. 한 명은 부산 사람이었고 정말 나이가 많았다. 서로 마음에 안 들어서 첫만남에 그만뒀다.      


세 명을 소개받으면서 느낀 점은 여러 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는 그 당시에 세 명을 세 번씩 만나느라 입이 다 헐고 몸살감기에 걸렸었다. 세 명의 신상이 헷갈려서 나이와 직장같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이 바쁘신가봐요’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일상 얘기도 로봇처럼 똑같이 했다. 세 명과 모두 연락한다는 걸 걸리는 꿈도 꿨다.      


그러다가 한 분만 남기고 두 분에게는 뜬금없이 ‘공부해야 해서 이제 바쁠 거 같습니다. 좋은 분인데 너무 죄송해요’라는 말을 남겼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공부해야 한다는 사람이 소개팅을 왜 받았냐는 말에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세 명 중에 나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3개월 동안 만나면서 그는 내게 모든 것을 맞춰주었다. 나는 사귀면서 생기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계속해서 말했고, 그는 계속해서 고치려고 했다. 사랑은 노력이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떠올리면서 노력했지만, 사랑은 억지가 아니었다. 물론 그 외에도 ‘김치녀’라는 말을 현실에서 쓰는 그를 보며 정 떨어진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했던 노력들은 절절하게 인정한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방학을 했다. 방학하면서 공부하면서 바쁘다고 끊었던 소개팅남 두 분이 연락이 다시 와서 만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만났지만, 그는 나를 혼내려고 만나자고 한 거였다. ‘아무리 바빠도 사람을 두 번만에 판단하면 안 된다’는 훈수질로 만남은 끝이 났다.      


그렇게 소개팅에 정이 떨어져갔다. 소개팅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출적인 모습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이곳저곳에 여지를 흘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문화해설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 명이 걸렸다. 그가 내게 번호를 물어보게끔 여지를 줬다. 여지를 주는 가장 쉬운 방식은 그 사람을 좋

아하는 티를 풀풀 내는 것이다.     


그렇게 관광객과 썸을 탔다. 관광객은 내게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었다. 단아하고 참하고 성숙한 느낌! 근데 친해지면 질수록 비글 같은 나라서 관광객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신 거 같아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이후로 처음 만난 사람을 보면 ‘제가 생각했던 것과 성격이 다를 수 있어요’라는 말을 꼭 하는 버릇이 생겼다.     


2019년 새해가 됐다. 친구가 자신의 절친을 소개시켜줬다. 이 친구는 오래 볼수록 좋은 사람이라고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친구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잘 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분도 내가 마음에 든다느니, 고백을 언제 할 거라는 말을 달고 사셔서 나는 이대로만 하면 잘되는 줄 알았다. 첫사랑과 비슷한 스타일이라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냥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분이 잠수를 타셨다. 아무렇지 않게 카톡하다가 갑자기 잠수를 타셨다. 1달을 연락했는데 잠수를 타셔서 배신감이 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정이 떨어지는 행동을 했을까 혼자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전에 ‘3명을 소개받았을 때의 업보를 지금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인생은 돌고 돈다.      


잠수썸남을 겪고 나서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하려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요가를 하면서 성숙한 정신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외모가꾸기’가 1순위겠지만. 내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는 스타일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다시 사람을 만날 때 신중해질 수 없을까라는 고민도 많이 했다.


고민이 많아서 혼술을 많이 마시러 갔다. 울산 생활의 답답함이 극치에 달했다. 가족들이 자꾸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실수인 척하고 버리는 부분도 속상했다. 맥주집 사장님과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사장님이 좋아하는 물건을 가게에 숨겨준다고 하셨다. 그래서 신이 나서 물건들을 가져갔다.      


사장님은 내가 가져간 물건들을 하나같이 좋아해주셨다. 봄베이사파이어부터 각종 술, 향초, 과일청을 가지고 갔다. 사장님과 친해져서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보니 연락도 하게 됐는데, 잠수썸남의 여파가 남아서 고백받는 순간까지도 의심을 했다. 30대 남자들은 여우를 닮아서 ‘이런 것도 그냥 했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장님을 만나게 됐다. 발렌타인데이부터 만남을 시작했으니 아직도 4일 밖에 안됐다. 정이현 작가는 <사랑의 기초>라는 책에서 연애 초기는 서로가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 확인하는 단계라고 했다. 지금은 서로가 닮았다는 것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서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되는 게 많아서 즐겁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내가 감정을 주는만큼 더 주려하는 분이셔서 좋다. 밀당없이 솔직하게 표현한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서운하면 서운한 게 얼굴에 다 드러나고, 기쁘면 기쁜 게 얼굴에 다 드러난다. 물론 나도 얼굴에 다 드러나겠지만.      


지금은 그저 좋은 단계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행복하다. 누가 손을 잡든지 중요한 게 아니라, 손을 잡았다는 거 자체가 행복하다. 몸이 약간 피곤하지만 옥시토신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하나도 안 피곤하다. 그래서 매일 봐도 에너자이저가 되는 거 같다.      


하지만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가 두렵다. 극단적 비관주의자인 나는 첫사랑이 끝나고, 한 가지 결심한 게 있다. 상대가 변하는 게 느껴졌을 때,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만둬야 한다. 예전에 첫사랑이 나를 보기로 한 날, 친구를 만났다. 그 당시에 화를 내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절절한 사과로 화가 풀렸다. 화는 풀렸지만 그 이후로 내 우선순위는 6위가 됐다.      


우선순위가 6위가 되면 ‘을의 연애’를 하게 된다. 맞추는 연애를 하면서 여러 부분에서 상처를 많이 받아서 우선순위가 6위가 되는 순간, 아무리 좋아해도 그만둘 거라고 결심했다. 그럴려면 사장님한테 많이 빠지면 안 된다. 내 진짜 마음을 속에 숨기고 연애를 해야 하는데, 사장님이 내 표현 때문에 상처받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서 표현을 하게 된다. 이러다보면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의 변한 모습을 보게 될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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