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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Feb 26. 2019

가부장제는 사랑의 반의어

벨 훅스

오빠와 저는 20살 여름에 국토대장정에서 만난 사이였습니다. 100km를 넘게 걸으면서 남자6명과 여자4명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꼭 함께 완주해야 한다는 목적의식 속에서 체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여자들은 남자들이 보호해야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깨를 짓누를 것 같은 가방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며 오빠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대에서 행군을 해봤다고 이야기하면서 물집 잡힌 발을 치료해주는 모습이 자상했습니다. 그때 생긴 호감으로 자주 연락하고, 얼굴 보는 사이가 됐습니다. 


 아는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낼 때도 보호는 일종의 호감표시로 작용했습니다. 늦게까지 여럿이서 술을 마신 날, 오빠는 밤길이 무섭다며 집 앞까지 데려다줬습니다. 저 사실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나면 밤이 늦어도 꿋꿋하게 집까지 걸어갑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약해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통금시간이 늦었다며 걱정하는 말소리를 들으며, 매일 걷는 밤길이 무서운 척했습니다. 뉴스를 보면 강도를 만나는 일은 남자, 여자 가리지 않던데, 오빠는 밤길이 하나도 안 무서워보였습니다. 강도를 만나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 연애를 시작한 시기는 23살이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사랑에 빠지면 종소리가 울린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제가 연애를 결심한 이유는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3학년이 끝날 때까지 연애를 못하는 여자는 평생 아무도 사귀지 못한다.’라는 속설이 캠퍼스 내에 퍼져있었습니다. 이대로 대학교 4학년이 된다면 평생 아무도 사귀지 못하는 여자애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돌아보니 그때 저는 참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앞날이 구만 리인 20대 초반인데, 대학교 3학년까지 연애 못 했다고 해서 평생 남자를 못 만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웃기는 유언비어에 속아 연애를 서둘렀던 제가 참 바보입니다.


 사랑에 빠져 종소리가 울리지는 않았지만, 오빠는 좋은 사람이 확실하니까 고백을 받아들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면서 오빠는 제 보호자 역할을 하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니까 보호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난생 처음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면서 막막할 때도 있었고, 난감할 때도 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도 많았는데 오빠가 참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3살 많은 나이가 위대해보일 정도로 모든 면에서 척척 해냈습니다. 


 취업준비생 생활을 먼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하반기 공채일정이나 자기소개서, 정부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취업성공패키지 등에 대한 정보가 많았습니다. 그런 오빠의 도움을 받으며 저는 비교적 편하게 취업준비생에 입문했습니다. 취업준비생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학교를 졸업하면서 처음 학교 기숙사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부모님은 저를 살펴주러 서울에 올라올 상황은 안 됐고, 혼자 해결해보려 애쓴다는 걸 알아챈 오빠는 적극적으로 도와줬습니다.


 “여자 혼자 집 보러 다니는 거 아니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멋있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월세가 저렴한 집을 찾다보니 집들은 죄다 인적이 드문 언덕 끝에 있거나 외진 골목 안에 있었습니다. 어둡고 빈 방에 부동산 아저씨를 따라 들어갈 때면 오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찔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집주인부터 부동산까지 여자 혼자 산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설명할 때는 울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조심해야하는 부분은 많지만, 무서워서 혼자 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려워만 보였던 취업준비생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호감 표시였던 보호가 갑갑해진 건 그때쯤이었습니다. 저는 연락을 귀찮아했지만, 오빠는 연락에 강박적이었습니다. 특히 밤에 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꼭 알려고 했습니다. 지금 누구랑 있고, 뭘 먹고, 몇 시에 집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했습니다. 유독 힘들었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잤던 날, 집에 도착해서 잘 거라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다음날 오빠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어떻게 집에 도착해서 연락도 안 하고 잘 수도 있냐고 몰아붙였습니다. 오빠는 제가 걱정돼서 밤에 한숨도 잠을 못 잤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저의 단짝 친구한테 연락도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오빠는 ‘지금 땡땡이 밖에서 술 먹고 있어?’ 라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저는 사귀면서 연락을 귀찮아하긴 했지만, 미리 말을 하지 않고 다른 남자랑 술을 먹은 적은 없습니다. 또 술자리에서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린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연애를 하면서 믿음을 저버릴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근데 오빠는 연락이 없던 밤 동안 제가 다른 남자와 술을 먹었거나, 술자리에서 정신을 잃어있었던 줄 알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밤에 연락을 못 한 게 이렇게 큰 문제인지 이해를 못한 상태에 있다가, 오빠의 보호가 걱정이 아닌 의심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그렇게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오빠는 네가 그 시간에 집에서 잠들었다는 것에 대해 증명해보라고 했고, 아르바이트 동료들과 친구들을 통해 잠든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이 그렇게 화가 날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나서 이번에는 제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오빠는 미안해하면서 말했습니다. 예전에 연애를 할 때, 여자친구가 거짓말을 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닌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못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랑이 더 굳건해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미안한 마음을 편지로 써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서로를 좀 더 믿기로 했습니다. 연락에 대해서는 규칙을 마련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점심먹을 때 한 번, 저녁먹을 때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씩 하루에 4번은 꼭 연락하기로 규칙을 정했습니다. 

카톡이 힘들면 전화로 대신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 일 이후로 저는 남자 지인들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혹시나 또 오빠가 오해할 일을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됐습니다. 지인들이 보내는 성적인 메시지를 제대로 못 읽고 남자들이 오해할만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뭐랄까, 이런 표현 별로지만, 헤픈 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더 단속하게 되는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남자들을 멀리하게 되었고, 남자들이 있는 모임을 안 나가게 되었고, 인간관계와 활동범위가 줄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얼굴 보는 횟수가 몇 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까지 모두 공유했습니다. 서로의 학번과 주민번호도 내 것처럼 외우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이런 정보들은 데이트할 때 할인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의 정보를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바꿀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에게 너무 경계도 사생활도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연락이 없을 때마다 오빠는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총동원해서 저를 찾곤 했습니다.   하루 4번 연락에 대한 갑갑함은 잠수 타는 회피성 버릇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규칙에 대한 갑갑함은 오빠와 만날수록 커져갔습니다. 인터넷에 나온 말처럼 커플 사이에서 싸울 때는 대화와 서로만의 합의가 최고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규칙만 늘어나고 갑갑함은 더 커졌습니다. 갑갑함에 대한 저의 회피는 결국 이별을 말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이의 대화가 도돌이표를 그린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사랑하니까 보호하려고 한다는 기본전제부터가 잘못됐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보호가 필요할까요? 두 사람의 성인이 만났고, 성인은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있습니다. 강한 한 사람이 약한 한 사람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홉스의 절대군주론을 보면,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 절대군주를 뽑고, 보호를 조건으로 인간들은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보호 행위를 통해 권력과 지배가 시작됩니다. 


 오빠와 저는 사랑이 아니라, 안전을 빌미로 사회계약을 맺었습니다. 오빠는 저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애정을 빙자해 저를 가두고, 제한하고, 무시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를 무능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저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연애 이후로 3년간 연애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빠와 헤어지고 나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동산에 가서 혼자 집 계약도 여러 번 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었습니다.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도 확인했습니다. 등기부등본은 계약할 때, 중도금 때, 잔금 때 세 번 다 확인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수도관이 꽝꽝 얼었을 때도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헤어 드라이기를 연결해서 수도관을 말리고, 사람을 불러 고쳤습니다. 사실 오빠가 해줬던 모든 일들은 돈과 정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밤길은 무섭지만, 운동을 하면서 한결 나아졌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차이를 인정하고 복싱보다는 달리기를 선택했습니다. 빠르게 도망갈 수 있는 힘을 길렀습니다. 덕분에 취미도 생기고, 체력도 좋아졌습니다. 지금도 종종 마라톤을 나갑니다. 내년까지 풀코스를 뛰는 게 목표입니다. 다 오빠 덕분입니다. 제 삶을 찾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오빠가 다시 만나자고 연락할 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보호를 빌미로 한 사회계약에 자유를 제한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두 사람의 성인이 동등하게 만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페미니즘이 남녀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사랑을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틀렸습니다. 여성주의야말로 사랑을 향한 투쟁이며, 사랑을 죽이는 가부장제의 해독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의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오만 가지 방법으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방식으로는 어떤 인간도 해방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인간마저도 말입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자로 사는 일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별일 아니라고, 원래 그렇다고, 제가 예민한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에 대해 자주 의심합니다. 성희롱이 야한 옷차림 때문이라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고, 더 이상은 체모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며 공공장소에서 생리대를 꺼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내 예민함 탓으로 돌렸던 불편함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용기도 얻게 되었습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전보다 한결 자유로워졌습니다.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사랑을 꿈꾸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다시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의 성인이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의무적인 연락을 하기보다는 서로가 그리워서 연락합니다. 강제적인 규칙을 만들기보다는 서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대화를 할 때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두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연애를 위해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가부장제는 사랑의 반의어라는 벨 훅스의 말을 자주 생각합니다. 가부장제에 복종하면 복종할수록,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가부장제의 권위의식,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사고, 여성의 생각과 자유를 앗아가고자 하는 시도들은 결국 누구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권력을 행사하면서, 남성은 완벽한 남성성을 가지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됩니다. 가부장제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심장을 딱딱한 돌덩어리로 만드는 독과 비슷합니다. 사랑을 복종이라고 착각한 인간은 좀비와 비슷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해방되는 사랑을 꿈꾸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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