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교엔에서 만난 일본 근대의 풍경
도쿄의 복잡한 거리를 걸어 신주쿠역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갑자기 공기가 바뀐다.
도심의 소음이 멀어지고, 나무들이 만든 그림자가 바닥에 잔잔히 흔들린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또 하나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 신주쿠교엔(新宿御苑), 도쿄 사람들이 사랑하는 정원이다.
나는 이곳을 거닐다가 문득 런던의 하이드파크가 떠올랐다.
넓은 잔디와 나무 그늘 아래서 자유롭게 책을 읽고, 피크닉을 즐기던 영국의 오후 풍경.
이곳에도 그런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여유 속에는 일본 특유의 정제된 질서가 숨어 있다.
과거, 나이토 가문의 정원에서 황실의 정원으로
지금은 시민의 공원이지만, 신주쿠교엔의 시작은 에도시대의 다이묘 저택이었다.
이곳은 다카토번의 영주 나이토 가문이 막부로부터 하사받은 토지였고,
그들은 이곳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나이토 저택 정원’이라 불렀다.
그 당시만 해도 도쿄 중심에서 떨어진 교외였고,
정원은 권력자의 사적 공간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정부는 근대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이 전통적 공간을 국가의 근대적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1906년, 프랑스 조경가 앙리 마르티의 설계로 지금의 신주쿠교엔이 완성된다.
그래서 이곳을 걷다 보면
일본식 정원의 연못과 소나무 숲 사이로
영국식 잔디밭이 넓게 펼쳐지고,
프랑스식 정형정원이 대칭적으로 자리한다.
한 나라의 ‘근대화’가 어떻게 풍경으로 표현되는지를,
이 정원은 묵묵히 보여준다.
황실의 정원, 그리고 시민의 정원
한때 신주쿠교엔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황실 전용 정원이었다.
벚꽃이 피는 봄이면, 천황과 황족들이 이곳에서 ‘오하나미(御花見)’를 즐겼다.
그런데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정원이 불타 사라진다.
이후 복구 작업이 이어지고, 1949년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비로소 ‘국민의 정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역사 때문인지, 이곳의 평온함에는
조용한 품격과 애잔한 기운이 함께 흐른다.
거대한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 자리에서 쉬고 있는 듯하다.
벚꽃과 사색의 계절
신주쿠교엔은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벚꽃 명소다.
65종, 1,000그루가 넘는 벚나무가 있어
3월부터 4월 중순까지 긴 시간 동안 꽃이 이어진다.
특히 ‘이치요자쿠라’가 피는 시기에는
마치 공원 전체가 분홍빛 안개에 잠긴 듯하다.
나는 봄의 교엔보다, 오히려 가을의 교엔을 더 좋아한다.
단풍이 붉게 물든 잎 사이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오후 햇살에 겹쳐질 때,
그 시간은 유난히 조용하고 깊다.
그 속에서, 일본의 근대화와 서양 문명의 흔적이
어쩐지 인간적인 감정으로 녹아 있는 듯했다.
도쿄 속의 또 다른 세계
도쿄의 중심에서
‘근대 일본’의 정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싶다면,
신주쿠교엔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자연과 질서, 전통과 근대, 일본과 서양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조용히 섞여 있다.
그 균형감이 바로 일본이 근대를 받아들인 방식이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적 아름다움의 근원처럼 느껴진다.
동양에 있으면서도 서양의 양식을 옮겨온 정원, 오늘 나는 유럽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일본의 힘이 새삼 느끼게 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