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고독하고 강인한 다리: 부모와 자식의 계절 사이에 서다 -
제4화. 가장 고독하고 강인한 다리: 부모와 자식의 계절 사이에 서다
시리즈 소개 : 인생의 절반을 지나 다시 마주한 '나'. 일, 가족, 관계,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다시 쓰는 인생의 문장들. 중년의 고요 속에서 얻은 깨달음과 위로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 텅 빈 집이 주는 여백
창밖에는 초겨울 비가 내리고, 나는 한 잔의 커피를 식혀가며 텅 빈 거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났고, 아내와 나만이 남은 이 공간은 갑작스러운 여백으로 가득했다. 이 텅 빈 공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가 13세에 겪었던 그 텅 빈 마음’의 잔상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내가 열세 살 되던 해, 예순한 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는 슬픔에 젖어 있을 시간조차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던 아버지의 부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가족을 지키는 가장’이라는 역할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 무게를 제대로 알게 된다.
그때의 나는 어머니의 강인함을 보며 슬픔을 뒤로한 채 ‘진정한 어른’ 이 되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 굳건했던 어머니마저 여든 해를 더 사시고 백세에 세상을 떠나신 지 8년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내게는 돌아갈 부모님의 집도, 나를 전력 질주하게 만들던 아이들의 작은 손도 없다.
| 악양골의 유산과 부재 속에서 배운 책임
젊은 날의 나의 방랑은, 결국 이 텅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인 하동 악양골을 떠나 서울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후, 나는 어떻게든 가정을 만들고 안정된 보금자리를 꾸려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 속에 살았다. 반도체 회사에서 밤샘 근무를 하고, IMF로 실직을 겪은 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은, '가장의 자리'가 허락하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나는 결혼 후 송파구 문정동을 거쳐 분당에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고,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이 안정의 시간 속에서, '물질적인 성공은 일시적일 수 있지만, 가족과 함께하며 얻는 감사와 성찰의 시간은 영속적이다'라는 진정한 삶의 안정을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끈끈하게 뭉쳐있던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고향 악양골에서 가져온 ‘회복 탄력성’이라는 가장 강력한 유산이었다.
그 유산은 나를 버티게 했고, 나 또한 그 힘으로 나의 아이들을 키워냈다.
| 두 개의 계절 사이에 놓인 다리
지금의 중년은 참으로 고독한 위치에 서 있다. 우리는 이미 떠나간 '부모의 계절'과, 이제 막 시작된 '자식들의 새로운 계절' 사이에 홀로 놓인 다리와 같다. 중년의 책무는 그저 다리가 되어 양쪽의 무게를 견디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놓아주는 것' 이야말로 가장 고독하고도 강인한 책임임을 깨닫는 것이다.
젊은 날, 나는 아이들이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의 체력과 속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지금, 나는 깨닫는다. 무턱대고 질주하는 체력이라는 가변적인 요소보다, 자신의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지 아는 '방향이라는 불변의 지표'가 훨씬 더 중요함을.
이제 부모의 책임은 그들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가장 가치 있는 방향을 찾아 그들의 문장을 써 내려가도록 조용히 응원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쉼표처럼 다가와, 나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다.
| 여운 있는 한 문장
나는 이제 두 개의 계절 사이에 선, 가장 고독하지만 그래서 가장 단단하고 강인한 다리이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한다. 너는 충분히 좋은 다리였다고.'
다시 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