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의 하루

- 눈 내린 침묵 속에서 삶의 온도를 찾다 -

by 방랑자 연필

1923년의 겨울, 그리고 청계사의 고요한 숨결


겨울 산행은 늘 출발부터가 설렘이지요. 새벽 공기가 코끝을 쨍하게 때리면, 왠지 모르게 삶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해요. 우리는 그 청명한 공기를 마시며 서울 근교의 유서 깊은 청계산(淸溪山) 자락, 청계사(淸溪寺)로 향했어요.


청계산 입구

청계사는 조선 개국 공신인조 준(趙浚) 선조께서 세우신 사찰이자, 평양 조 씨 문중의 본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사찰 뒤편으로는 국사봉과 이수봉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그윽한 적막감이 감도는 곳이지요. 옛 고풍스러운 돌담 대신 현대식 기와담이 멋스럽게 어우러져 있어, 오랜 역사와 현대가 조용히 조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 깊은 산사의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바로 일제 강점기 1923년, 눈 내린 새벽 지리산 악양골에 내려왔던 커다란 호랑이 이야기였지요.

눈이 오면 산짐승들이 마을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해쳤던 그 시절, 여섯 살이셨던 어머니가 보셨던 중발만 한 불빛 두 개 —어머니는 호랑이라는 걸 직감하고 어린 딸의 입을 막고 방문을 걸어 잠그셨다고 했어요.

'길은 늘 우리보다 느리지만, 결국 가장 정확한 속도로 삶을 이끈다요, '


눈덮힌 청계사

수많은 세월과 이야기가 숨어 있는 이 산사처럼, 우리의 삶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사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 내린 겨울 산사를 거닐 때면', 시간의 흐름을 잊고 깊은 역사의 숨결에 잠시 머무르는 기분이 들어요.


소나무 능선길, 동행이 남긴 발자국의 온기


청계사를 끼고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절경이었어요. 줄지어 선 소나무들이 저마다 독특한 자태를 뽐내며 도열해 있는데, 눈으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걷는 재미가 쏠쏠했답니다.

전날 눈이 온 덕분에, 산 공기는 맑고 투명하여 겨울 산행의 진정한 묘미를 느낄 수 있었어요. '이 청명한 공기, 그냥 마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네요!' 옆에서 걷던 산우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어요.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그 침묵 속에서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지요.


청계사에서 바라본 청계산 국사봉

눈 덮인 산길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걸었을 길도, 눈이 쌓이면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딛게 되죠. 바로 그 '신중함'덕분에 우리는 더 자주 뒤를 돌아보고, 앞선 동행의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을 수 있었어요. 누군가 이미 지나갔던 이 산길 위에서, 우리는 단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동행의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먼 훗날, 손자에게 '코로나를 피해 이 산길을 헤매었던 그 시절'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길을 다시 거닐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눈 내린 겨울, 친구들과 함께 몽환적인 낭만 분위기를 찾아 산을 헤매는 열정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걷는다는 기적, 그리고 뒤풀이 국물 한 숟가락의 위안


산행을 마치고 하산할 때 느껴지는 해방감은, 정상을 밟았을 때의 벅참과는 또 다른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오늘 하루를 온전히 내 발로 걸어 완주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오지요.

산행 후 뒤풀이는 우리의 완벽한 하루를 완성하는 마법의 시간입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뜨끈한 국물 한 사발과, 힘든 길을 함께 걸어온 친구들의 소박한 웃음이야말로 그 어떤 명품 요리보다 값진 위로가 되어주어요.


청계사 2020.12.16

우리는 동네의 작은 식당을 찾아 뜨끈한 해물칼국수를 시켰어요. 사장님은 정갈한 밑반찬과 함께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칼국수를 내어주셨는데, 그 국물 맛에서 지역 상인 특유의 성실함과 깊은 손맛이 느껴졌어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산행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정성으로 채워주는 '경영적 통찰'이 담긴 한 그릇이었답니다. 이런 작은 가게들이야말로 우리 여행의 숨겨진 보석이지요.


산우들과 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이야기했어요.

'오늘 눈 내린 길을 걸으면서, 어릴 적 그 호랑이 이야기가 왜 그렇게 선명했을까요?'


청계산 2020.12.16

'그건 아마도, 길 위에서 만난 사소한 장면들이 결국 우리 삶의 가장 깊은 부분과 연결되기 때문일 거예요.'


'걷는다는 것은, 결국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를 잇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기적'입니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길 위에서, 독자님은 어떤 온도를 느끼셨나요?


'내일의 길이 당신의 마음을 다시 부를 때, 주저하지 않고 다시 신발 끈을 맬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요.'



하늘길 조해연 (Skywriter Haeyon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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