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화. 낯선 언어와 오래된 그림자 -
제2화. 낯선 언어와 오래된 그림자
테이블 위에 홀로 남겨진 낡은 종이. 그것은 A3 용지에 프린트된, 희미한 잉크 자국이 남은 '공장 내부의 평면도'였다.
재훈은 마치 25년 전으로 돌아간 듯, 평면도에 그려진 익숙한 기계 배치, 동선, 자재 창고의 위치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도면 위를 스치자, 잊고 있던 공장의 기름 냄새와 쇠를 깎는 소음이 환영처럼 밀려왔다.
“혹시… 제조업 쪽 일 해보셨어요?”
등 뒤에서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단발머리 청년, 민서진이었다. 그녀는 팀원들을 먼저 보내고 도면을 챙기러 돌아온 듯했다.
재훈은 화들짝 놀라며 도면에서 손을 뗐다. 그는 순간 흠칫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예. 뭐… 좀 오래 했습니다.” 재훈은 자신의 25년을 '좀 오래'라는 세 글자로 축소했다. 상실감에 젖은 그 세월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저희는요, AI 기반 제조 공정 예측 모델링 서비스를 개발 중이에요.” 서진은 다짜고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재훈이 20대에 품었던 것과 똑같은 강렬한 열정이 있었다. “데이터는 MVP(최소기능제품)까진 됐는데, PMF(시장수요에 완벽한 제품)는 아직… 이번에 피벗(전략 수정의 뜻)을 고민 중이에요.”
서진의 언어는 재훈에게는 완전히 낯선 '외계어' 같았다. AI? MVP? 피벗? 그가 알던 언어는 '수율', '납기', '인력관리'뿐이었다. 세대 간의 단절이 언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그는 깨달았다.
"죄송한데… 재훈은" 조심스레 말을 끊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서진과 그녀의 옆에 있던 팀원들은 놀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른단 말이야?'라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서진은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아… 그… 그냥 어려운 거예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재훈은 쓰게 웃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했던 세상이 '끝난 것'이라는 냉정한 진실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정희 사장이 카운터에서 조용히 재훈을 바라보더니, 서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젊은 양반. 저분, 조금이라고 해도… 꽤 아실 거예요.”
정희의 말에 서진은 재훈을 다시 붙잡으려 했으나, 재훈은 이미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서진의 강렬한 열정이 두려웠다. 그 열정이 자신의 텅 빈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았기 때문이다.
출구 앞에서, 재훈은 문득 멈춰 섰다. 서진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의 뒤통수에 박혔다.
“... 진짜 필요한 건 경험일 텐데.”
재훈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동탄 3번 출구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 그 말이 '오래된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제3화'는 내일 금요일에 이어집니다.
이해담 (Elias Th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