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화. 다시, 바닥에서 올라오던 기억 -
제3화. 다시, 바닥에서 올라오던 기억
재훈은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내내 서진의 말을 곱씹었다. ‘진짜 필요한 건 경험일 텐데.’
그 경험은 재훈에게 25년의 경력이자, 동시에 그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낡은 족쇄였다. 텅 빈 퇴직금 계좌만큼이나 그의 마음은 공허했다.
집에 도착해 아내가 차려준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는 집중할 수 없었다. 아내는 늘 하던 대로 상냥했지만, 그 상냥함 속에 숨겨진 불안과 걱정을 재훈은 읽을 수 있었다.
밤늦게, 재훈은 서재로 들어가 캐비닛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낡은 사물함 열쇠'를 꺼냈다. 그것은 첫 직장, 공장 현장에서 쓰던 사물함의 열쇠였다. 먼지가 쌓인 열쇠를 손에 쥐자,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1995년. 스물일곱 살의 하재훈은 땀에 절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는 엘리트의 길 대신 현장의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을 택했다. 공장 바닥은 늘 기름때와 쇳가루로 미끄러웠지만, 그에게는 그곳이 세상을 배우는 대학이었다.'
“재훈아, 넌 왜 굳이 이런 힘든 일을 하니? 사무실로 가야지.” 선임이 물었을 때, 재훈은 웃으며 말했다. “물건이 만들어지는 이 시간과 과정을 알아야, 나중에 제대로 된 공장을 설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그렇게 밤낮없이 일하며 공장의 모든 설비와 동선을 머릿속에 새겼다. 현장의 아주 작은 미묘한 소리만 들어도 기계의 이상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기계와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곧 그의 지혜이자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은 달랐다. 회사의 인사팀장은 그를 고급 회의실로 불렀고,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인건비 줄여야 해요. 이번 분기 안에 10명 구조조정입니다.”
재훈은 그 순간, 자신이 '인건비'라는 숫자로 축소되었다는 것에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25년 동안 단 한 번도 회사에 실망시키지 않았던 그였는데, 회사는 그를 숫자로 계산했다. 회의실 창밖으로 보이던, 그가 평생을 바쳐 지었던 공장 건물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현재로 돌아온 재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상실감의 잔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는 그 경험이 다시 자신을 아프게 할까 두려웠다. 휴대폰이 울렸다. 민서진이었다.
[카톡] 서진 '혹시… 내일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저희가 지금 꼭 여쭤봐야 할 현장 문제가 있어서요.'
재훈은 대답 대신 자신의 경험을 버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는 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지금은 그런 거… 잘 모르겠어요."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서재 창밖으로 동탄 신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수많은 불빛들이 깜빡이는 모습이 마치 서진 팀이 외치던 'AI 모델'의 코드처럼 복잡하게 느껴졌다.
그때, 또 다른 카톡이 도착했다.
[카톡] 서진: '그 ‘조금’이… 저희한테는 큰 도움일 수도 있어서요. 정희 다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서진은 재훈이 보낸 거절 메시지를 보지 않은 듯, 끈기 있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훈은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화면만 바라보았다.
'제4화~5화'는 다음 주 목요일, 금요일에 이어집니다.
이해담 (Elias Th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