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화. 피벗, 그리고 멈춘 시간 -
제4화. 피벗, 그리고 멈춘 시간
재훈은 결국 정희 다방으로 향했다. 거절을 직접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희 다방에 들어서자, 서진과 팀원 두 명이 여전히 노트북을 펴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재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조금 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진 채 간절한 눈빛으로 재훈을 맞았다.
재훈은 애써 냉정함을 유지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거절하러 온 겁니다.
'괜찮습니다.' 서진은 재훈에게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일단 저희 이야기를 들어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서진은 능숙하게 태블릿을 켜더니, 복잡한 그래프와 도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저희 서비스는요, 제조업 라인에 센서를 부착해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AI에 학습시키는 시스템이에요. 수율을 15% 높이고, 설비 고장을 예측해서 납기를 정확히 맞출 수 있습니다.”
재훈의 귀에 익숙한 단어들이 들리자, 그의 무관심했던 눈빛에 미묘한 긴장이 맴돌았다. 수율, 납기. 그것은 그의 세상이었다.
“저희는 지금 PMF(Product-Market Fit)를 찾아야 하고, 이를 위해 피벗(Pivot)을 고민 중이에요. 즉, 서비스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뜻이죠.” 서진은 재훈이 이해하지 못할 단어들을 쏟아냈다.
재훈은 서진의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녀의 설명은 논리적이었지만, 그의 25년 경험이 본능적으로 '뭔가 빠졌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고장이 나는지, AI가 예측을 못 합니다.' 서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데이터 분석 결과, 고장 직전의 센서 데이터는 항상 특정 패턴 없이 튀어요. 기술팀은 이걸 미지의 오류로 정의했어요.'
재훈은 무심코 질문했다. '그 공장의 온도는요? 습도는요? 야간 교대 근무자의 숙련도는 AI가 측정합니까?'
서진과 팀원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그런 게 중요해요?'라고 묻는 듯했다.
“저희는… 데이터가 중요해요.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정확도가 올라가죠.” 서진이 말했다.
“하지만 기계를 돌리는 건 결국 사람이고, 공장의 설비는 환경에 반응합니다.” 재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AI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오류'는 아마도 데이터가 놓친 현장의 아주 사소한 '틈'일 겁니다. 예를 들면, 늦은 밤, 숙련도가 낮은 교대 근무자가 밸브를 아주 미세하게 덜 잠근다던가… 아니면 환기구 틈새로 들어오는 습기가 센서에 영향을 준다던가 하는 '인간과 환경의 변수' 말입니다.”
서진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는 동안, 재훈은 이미 25년간의 경험으로 현장의 수많은 '틈'을 알고 있었다.
“그게… 진짜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서진이 중얼거렸다.
재훈은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조언입니다. 기술은 도구일 뿐,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다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서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장님! 잠시만요!”
재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경험'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이 자신을 다시 고통스럽게 할까 봐 두려웠다.
이해담 (Elias Th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