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화. 상처와 다시 열린 문 -
제5화. 상처와 다시 열린 문
재훈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낮에 정희 다방에서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이 내뱉은 조언이 그들에게 정말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까? 하지만 잠시 피어올랐던 희망은 곧 차가운 현실에 가로막혔다.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질까?’
그는 퇴직 후 텅 비어버린 자신의 서재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제조업 관련 서적으로 가득 찼던 공간이, 이제는 고독과 불안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빈 공책을 펼쳐보았다. 퇴사 후 매일 무엇이라도 적어보려 했지만,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한 채 날들만 쌓였다. 그 공책은 그의 '멈춰 선 시간'을 상징했다.
다음 날 아침, 재훈은 다시 구인구직 사이트를 검색했다. 나이 제한, 경력의 불일치. 좌절감은 반복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제 이 사회에 '쓸모가 없다'는 깊은 자기혐오와 싸우고 있었다.
오후 2시, 휴대폰이 울렸다. 민서진이었다.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카톡] 서진: 부장님, 어제 말씀해 주신 대로 현장 환경 변수를 체크해 봤습니다. 놀랍게도, 야간에만 발생하는 '미세한 습도 변화'가 센서 데이터에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재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경험이 옳았다. AI가 놓친, 인간의 감각만이 포착할 수 있는 '틈'이었다.
[카톡] 서진: 이것 덕분에 저희 팀은 기술의 방향을 '사람과 환경을 포용하는 시스템'으로 피벗 하기로 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재훈은 메시지를 읽는 내내 손이 떨렸다. 기술을 향한 청년들의 믿음을 꺾을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틈'을 통해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 용기를 냈다.
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카톡] 서진: 혹시… 내일 저희와 함께 공장에 다시 가주실 수 있을까요? 현장의 눈으로 저희 AI 시스템을 검증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부장님께 드릴 수 있는 건... 현재는 이 작은 프로젝트의 공동 현장 책임자 자리뿐입니다. 급여는 많지 않지만, 저희에게는 부장님의 지혜가 미래입니다.
재훈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현장 책임자'. 25년 부장 경력에 비하면 초라한 자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진은 그에게 '지혜'라는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상실된 경력이 '재활용될 수 있는 가치'임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카톡] 재훈: 내일, 동탄 3번 출구 앞에서 뵙겠습니다.
재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서재로 들이쳤지만, 그의 마음속은 오히려 따뜻하게 데워지는 듯했다. 멈춰 섰던 재훈의 시간이, 다시 시작될 문을 열고 있었다.
이해담 (Elias Th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