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체를 그렸지? 민망스럽게. 그것도 거룩한 성전에. 천지 창조를 감상하며 질문이 일어 미술사를 전공한 이들의 강의를 듣는다. 하지만 만족한 답을 얻을 수 없어 궁금증이 일다 한 생각이 떠 오른다.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힌트를 얻은. 진리에 눈뜨는 환희와 함께 가슴이 쿵쾅거리는 생명력이 솟는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작품을 감상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작가를 이해하고 말하고 싶은 진실을 작품 속에서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 기술의 능력을 감상하는 것이다. 이 둘을 조화하여 작품 감상을 하는 것이 최선일테지만 대부분 천지창조를 작가의 인간관계와 표현 기법을 기반으로 감상을 한다.
미술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지만 난 미캘란젤로의 신앙 고백을 상상하며 천지창조 감상을 한다.
작가가 살던 시대는 성전의 건물은 거룩하고 위엄 있게 지어졌고, 성직자들은 화려하고 성스러운 롭을 입고 하나님의 권위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온갖 혜택을 누렸다. 특별한 은총을 받은 선택받은 사람인양 거들먹거리며. 그리고 백성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신학 용어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합리적이지 않은 설로 '이래야 천국 간다. 저래야 축복받는다' 설교를 한다. 결국 백성들은 진리에 눈 뜨지도, 하나님과 소통되지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혜를 누리지도 못하고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은 그림의 떡이 되었다. 오히려 눈뜬 봉사가 되어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며.
결국 더러는 교회를 떠나고, 더러는 뜨거운 믿음이 있어지려 열심을 내고, 더러는 능력 있다는 목회자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사이비 성직자들은 입에 발린 거짓으로 이들을 모아 감정을 뜨겁게 하여 맹종하는 종으로 삼고 권력과 부를 누린다. 이러한 환경은 불쌍한 백성들을 이중 인격자로, 맹목적인 신앙인으로, 외롭게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려고 발버둥 치게 하는 암흑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미켈란젤로는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지 않았을까? 처음엔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 했을 터. 그러다 실망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하고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으며 질문하고 찾고 구하지 않았을까? 이러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발가벗은 정직한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거나, 발가벗은 초라하고 연약한 자신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목마르고 뜨거워진 마음을 주어진 재능으로 나체를 조각하고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이런 미캘란제로에게 성전 천장화와 벽화를 그릴 기회가 주어 진다. 하지만 성전에 신앙 고백을 묘사하려니 교회의 거룩에 역행하는 일이어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터. 그래서 거절하다 결단하고 발가벗은 영혼에게 주어지는 생명력으로 성전 천장을 바라보고 몸이 망가지도록 붓놀림 한 것이 아닐까?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은 정직한 영혼이 이해한 말씀을 천장에 그리며 때로는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의 기쁨을, 때로는 만져 주심과 치료하시고 용기주심을 경험하며 4년 동안 힘든 일을 해 낸 것이 아닐까? 그리고 다시 위선 가득한 가짜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통쾌하지만 아픈 마음으로 그린 것은 아닐까?
이렇게 탄생한 작품에서 신비한 능력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명을 건 신앙 고백으로 붓놀림하는 동안 녹아들어 간 그림 안의 생명력이 돋아나는 새싹처럼, 정직하게 토해 낸 신앙 고백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처럼, 몸이 상하는 고통스러운 열정이 잘 익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게 한 것이 아닐까? "정직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듯이.
그림 감상하는 것을 기죽어 포기했던 나에게 천지창조를 감상하며 "발가벗은 정직한 영혼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은혜를 누리고, 밝은 빛으로 나가 진리에 눈뜨고, 공감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며 행복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음성이 가슴 아프게 들린다. 발가벗으면 벗을수록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리고, 진정한 사랑을 나눌 있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자아가 살아나, 때로는 불의를 향해 아니라 말하고, 때로는 희생하며 존귀한 존재의 삶을 살게 하는 생명력이 주어진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