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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준호 Aug 19. 2023

잃었다 찾은 좋은 친구들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이 밤에' 서둘러 눈물을 훔치며 자연스러운 탈을 쓰고 "누구세요?" 했다. 문 밖에서 "미현이 에요" 했다. 머리가 번개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랑과 답답함과 그리움으로 나를 우울에 빠지게 한 여인의 목소리다. '잘 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며 방안을 점검하듯 둘러보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미현이 담담하게 문 앞에 서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이태리에서 미술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하고선 "들어오세요." 했다. 미현이 소파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고는 "공부보다 중요하게 할 일이 있어서 돌아왔어요"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했다. 나는 호기심에 크게 떠진 눈으로 미현을 바라보며 "공부보다 중요한 일이요?" 했다. 미현이 차분하게 "네" 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 일이 뭐예요?"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물었다. 미현이 숨을 고르고 담담하게 "좋은 친구 만드는 일이요." 했다. 나는 동그레진 눈으로 미현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대국에서 진 바둑 기사가 한 알 한 알 놓은 돌들을 아리게 복기하듯 전도사로 청년들과 첫 만남 할 때의 기대와 나눈 말들이 생생하게 재현이 된다. 


    '당신들과 좋은 친구 되고 싶어요'라는 이야기로 모임을 시작해야지. 가면 벗고 틀도 깨고 질문하고 답하고 생각을 나누다 보면, 삶에서 받은 상처가 치료되고, 편견으로부터는 자유해지고, 분별력과 지혜도 커지겠지? 그리고 내면에 있는 오만가지 생각들 중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선한 언어를 골라 사용하면 우정은 깊어지겠지? 그렇게 맺어진 친구들이 서로 다른 창의력과 상상력과 탤런트를 연합하면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 거야!' 상상하며 나는 하늘을 날 듯했었다. 

    이렇게 들뜬 마음으로 토요일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질투라도 하는지 느려 터지게 흘렀다. 긴 밤을 건너뛰려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 아뿔싸, 눈거플 속에 강제로 갇힌 눈동자가 말똥말똥 거리며 수많은 생각들을 머릿속에 들락거리게 한다. 결국 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피곤해진 몸을 일으켜 창박을 보았다. 아직 어둠이 깊다. 시곗바늘이 10시를 가리켰다. 겨우 1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하다 비몽사몽간에 시계를 보니 고작 한 시간이 지났다. 자다 창밖을 보고 시계 보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게슴츠레 떠진 지친 눈을 비비고 창밖을 보니 희고 푸르게 하루가 열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피곤을 씻으려 찬물로 샤워를 했다. 들뜬 마음만 남았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서두르는데 시간은 여전히 게으름을 피운다. 시계를 보고 또 보다 아직 아무도 없을 듯한 교회로 출근을 했다. 출입문이 굳게 잠기어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핸들을 돌려 청년들이 살고 있을 마을을 드라이브하며 둘러보았다. 골목골목이 모두 정겹다.

    낯 익혀진 동네를 뒤로 하고 교회로 왔다. 철문이 환영이라도 하듯 활짝 열렸다. 종종걸음으로 강 목사님 사무실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교회와 목회에 관한 이야기를 건성으로 나누었다. 부푼 가슴이 다 잘 될 것이라 여기게 하여 살펴야 할 일들을 꼼꼼하게 나눌 수 없게 했는가 보다. 휘파람 불며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사무실 여기저기를 훑어보다 회전의자에 앉아 빙그르르 돌려 보았다. 사명을 다한 이가 맛보는 행복을 누리는 듯했다. 책상 서랍 하나하나를 열어 보았다. 텅 비었다. 청년부 한 명 한 명의 이름들이 기록된 신상명세서를 읽고 또 읽고 가슴에 새긴 후 빈 서랍을 채웠다. 20명이다. 직장인, 학생, 재수생, 자영업 하는 이 다양하다. 


    거울 안에 비추인 내 얼굴에 씽긋 미소를 주고 청년부 방으로 갔다.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단장이 되었다. 나를 기쁘게 맞이하는 마음들이 보였다. 응답하는 마음으로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사다 4개의 맑은 유리컵에 나누어 꽂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놓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살폈다. 달콤한 장미 향이 마음을 부추겨 '어떤 모습의 청년들일까? 어떤 부분에 관심이 많을까? 어떤 질문들이 나올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질문을 토론이 되도록 해야지, 내면에 있는 짐승이 주는 생각, 하나님이 주는 생각, 이기심이 주는 생각, 좁쌀 같은 생각, 토라진 생각들을 분별하고, 진리와 지혜를 깨달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골라 논리에 따른 대화를 해야지.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서로 친밀한 친구가 되겠지?' 기대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힘겨웠던 지난날들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떠 올랐다.

     논리 없는 교리가 믿기지 않아 세뇌시켜 믿으려 애쓰던 순간들, 경건한 탈을 쓰고 거룩한 목소리와 몸가짐으로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다 외로움에 떨던 순간들, 은혜와 사랑의 높은 장벽 뒤에 숨은 불의와 거짓과 싸우며 억울하고 분하여 치를 떨던 순간들, 노예와 거지 근성을 뿌리로 둔 신앙생활을 하다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기도에 모두 응답해 주신다면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들이 어떻게 생기는 걸까? 기도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갈등하며 밤하늘을 바라볼 때 별빛이 차갑게 느껴지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마침내 어려움과 아픔을 넘어 청년들과 진실을 나누며 진정한 친구 삼을 순간을 맞았다.     


    오후 4시다. 1시간 남았다. 만남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설렘이 두근거림으로 바뀐다. 감정을 추스르고 서성이는데 한 청년이 들어와 눈 맞춤을 하고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유천입니다.” 했다. 청년이 “미현이에요.” 반응하고, 눈 맞추기 쑥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보며 “꽃꽂이까지 해 놓으셨네요. 앞으로는 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할게요.” 했다. 그리고 컵에 주스와 다과를 준비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다소곳이 섬기는 미현의 모습을 넋 잃고 바라보는데,  허스키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며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청년이 들어왔다. 나는 들킨 듯 놀라 얼굴이 화끈 거림을 태연스러운 가면을 쓰고 "유천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했다. 청년은 한 손으론 머리를 긁적이고 한 손으론 내 손을 잡고 “김 수천이에요." 하며 꾸뻑 인사를 했다. 세명의 청년이 연이어 허리를 굽혀 어설픈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하니 고개 숙여 “안녕하세요” 하고 자리에 앉았다. 청년들이 연이어 우루르 들어와 20여 명이 반갑게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모임 시작할 기회를 보았다.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공감을 이루었나 보다. 잠잠해졌다. 고요를 깨고 모두를 둘러보며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신앙생활을 같이 할 유천입니다. 만남을 시작하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했다. 청년들 모두가 귀를 쫑긋하고 집중을 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나는 여러분들과 좋은 친구 되고 싶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과 틀을 벗고 마음껏 질문하고 답하고 생각을 나누며 신앙을 맛있게 익히고 싶어요." 했다.

    이때다. 단호하고 불만 있는 목소리로 미현이 “기도하고 시작하지요.” 했다. 나는 다시 틀에 갇히는 답답함을 느끼며 "아---  그러지요" 하고선 "미현 씨가 기도를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했다. 미현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전도사님이 해 주셔야지요." 했다. "아---  그런가요?" 하고는 "그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생각과 마음을 정직하게 나누며 신앙이 성숙하여 서로 진정한 친구 되게 해 주시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했다. 


    기도를 마치자 어색한 공기를 자연스러움으로 바꾸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전에 하던 성경공부와 많이 다른가 보다. 불안해하는 표정도, 새로운 분위기에 초롱 초롱해지는 눈동자들도 보였다. 이때 왼편에서 소곤거림이 있은 후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황 파악을 위해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며 기숙이 장난기 어린 질문을 애교스럽게 했다. "어떻게 전도사님이 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이성이 다르고 나이 차도 있는데, 그리고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이기도 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두가 내 입에 집중을 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2000살이나 더 많은 예수님도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시는데, 겨우 몇 살 더 많은 내가 당신들과 친구 되고 싶다는데, 그것이 그렇게 이상하나요?" 했다. 예상치 못한 되치기 응답에 어리둥절해진 청년들에게 "친구를 정의하면 좋은 친구 되고 싶은 내 마음이 이해될 거예요. 친구의 정의를 내릴 분 있어요?" 하고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곧장 온 듯 회사 배지를 아직도 목에 걸고 있는 철수가 더듬거리며 "음, …. 나이가 같고, 학교를 같이 다니고, 그래서 비밀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해진 사이가 아닐까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숙이 "난 사랑하며 마음과 뜻과 지식과 부끄러움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잘 되는 여건이 나이가 같고 학교를 같이 다닌 것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는 내숭 떨 것 없으니 소꿉친구가 되는 것이고.... 그러나 진실을 나눌 수 없어 친구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어요." 했다.

    영호가 오른손을 들고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인간관계로 스트레스가 많아요. 함께 자라고 학교도 같이 다녔지만 속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신뢰도 되지 않는 친구들이 있어요. 직장생활을 함께 하는 이들 중에 나이는 같아도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나를 친구라고 이야기할 땐 기분이 그저 그래요. 그러나 마음이 통하고 신뢰되어, 고민을 털어놓고 상의하며,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인데, 나이 차이 때문에 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 이들도 있어요." 기숙이 추임새를 넣듯 "진정한 친구가 일생에 단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했다. 

    잠잠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수천이 "진정한 친구, 건성인 친구의 차이 때문에 선뜻 친구를 정의하기가 어려워지네요. 그러나 친구란 가깝게 허물없이 사귀는 사람 아니에요?  친구 되기 위한 첫째는 가면을 벗는 것이고, 둘째는 문화와 사고에서 공감을 이루는 것이고. 여기에 사랑이 첨가되면 진정하고 진실한 좋은 친구가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나, 한쪽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인간의 한계 때문일지? 약점 때문일지?... 가면 쓰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서 진정한 좋은 친구가 되기가 불가능한 것 아니에요? 그래서 난 진실하고 친밀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님 한분이라 여기고 살아요. 나의 부끄러운 모든 것을 드러내도 소문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질수록 사람과도 친구의 우정이 깊어지는 거예요.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더 잘 먹는 것 같은 법칙 때문인지, 정직해지는 훈련이 되어서인지 몰라도....  그래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정직하게 모든 감정과 생각과 지식을 하나님과 나누는 사람을 배우자로 찾고 있어요" 했다.


    몇몇은 흥미로워 눈동자에 빛이 나지만 더러는 지루한 듯 몸을 비틀며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미현은 기도로 시작할 줄 모르는 전도사가 신뢰되지 않는데,  '성경공부 시간에 친구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까지 하다니, '  불만으로 한숨을 쉬었다. '신앙이란 이성으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고,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은혜를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내어 놓고 뜨겁게 기도하려고 모였는데, 그래서 삶에서 거룩을 이루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맛보아야 하는데,  질문하고 토론하며 논리에 따르면 신앙의 갈등만 커질 것이 뻔한데, 이렇게 황금 같은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고 있다니, 그리고 좋은 친구가 되자니, 우리가 친구 사귀려 교회에 나왔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 나왔지!' 불평하며 망설이고 망설이다 폭발하듯 단호한 톤으로 "이런 이야기하는 것보다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피곤하게 직업 전선에서 일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와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시간 아니에요?"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장미의 달콤한 향기가 사람 냄새와 뒤섞여 방 안의 공기가 탁해져 답답했다. 친구 이야기는 중단되고, 서로 자신을 소개하고 기대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뜨겁게 통성으로 기도하고 모임을 마쳤다. 모두가 돌아간 텅 빈 방에서 나는 홀로 질문을 했다. '뜨겁게 기도하면 100% 응답해 주신다고 확실하게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병들 사람, 실패할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할 텐데....' 외로움과 함께 피곤이 몰려왔다. 다음 모임에도 그다음 모임에도 성경과 교리의 다른 해석으로 청년들 사이에서 서먹서먹한 상황이 반복되다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긴다. 모임의 횟수가 지날수록 한쪽 사람이 이야기하면 다른 쪽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다른 쪽이 주장하면 상을 찡그리며 좋은 친구가 되기는커녕 불신과 미움이 커진다.


    토요일이면 먼저 와 꽃을 꽂고 다과를 준비하던 미현이 시간이 되었는데도 보이 지를 않는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 블록을 시켰나 보다. 집으로 찾아가니 어머니가 예의 바른 경건한 목소리로 "집안에 행사가 있어 토요일 모임에 나갈 수 없다"라고 변명을 했다. '교회의 행사에 참여하는 일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사는 청년이었는데.....' 그다음 주에는 또 몇몇 청년들이 보이 지를 않는다. 부풀었던 꿈은 사라지고 청년부 방 안의 공기도 생기를 잃었다.  

    미현이 이태리로 유학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는 어깨가 처지고 머리를 곧게 세울 힘마저 없어졌다. 결국 기울어진 머리는 의욕까지 사라져 텅 비고 가슴은 우울로 가득하다. 모임을 마치고 청년들이 돌아간 방에 어둠과 함께 남았다. 어디선가 장 피에르의 고독한 양치기 선율이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실려와 외로움을 부추긴다. 진실을 이야기해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하던 미현이 눈물 속에서 아른거린다. 의미 없이 불편한 표정으로 머무르다 돌아가는 소통되지 않는 몇몇의 청년들이 뇌리 속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듯하다. '그만두어야지. 유익은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며 자리를 지키는 것은 나와 모두의 시간과 정력 낭비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외롭고 힘겨운 시절을 극복하고 찾은 행복의 기대가 다시 물거품 되어 우울 한 밤, 우울하게 한 주인공 미현이 이태리에서 돌아와 내 앞에 있다. "좋은 친구 되려고 돌아왔다" 이야기하며. '무엇이 그에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을까? 여인의 변덕일까?' 나는 "어떻게 그렇게 바뀌었어요?"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미켈란젤로를 만났어요." 했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꿈에요?" 했다. 미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아니요" 하고는 다시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며 차분하게 "내 가슴속에서 좋은 친구로 질문하고 설득했어요." 했다.

    머리는 의심이, 가슴에서는 막혔던 담이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혼돈을 정리하려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보세요." 했다. 미현이 "이태리로 유학을 갔는데 우울함과 외로움을 떨칠 수가 없는 거예요. 학기 시작 날이 다가오는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홀로 성지순례를 했어요. 갈릴리 바다, 골고다 언덕, 광야, 곳곳을 둘러보며 예수님의 마음을 깊게 느끼고 힘을 얻고 싶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느껴지지 않고 거룩과 위엄만 느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녀가신 곳에는 화려하고 위엄 있는 기념 교회들이 세워 저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곳에선 검은색 롭을 입은 성직자들이 큰 지팡이를 들고 거룩하고 위엄 있게 예식을 집례하고 있었어요. 나는 위엄과 거룩에 압도돼 엄숙해 젔어요. 

    숙연하지만 외롭고 우울함은 여전했어요. 그렇게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교회 앞에 섰을 때였어요.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오는 낯선 것들이 있는 거예요. 소원을 적어 작게 접어 건물 구석구석에 빼곡히 꽂아 놓은 쪽지들. 한참을 멍하게 허전한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밖에서 손뼉 치며 '골라 골라'하는 서툰 한국말이 들리는 거예요. 귀가 번쩍 뜨였죠. 나가 보니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신바람 나게 하는 거예요. 고통받으며 사랑을 실천한 예수님을 이용해 돈 벌고 출세하려 건물을 그럴듯하게 지어 놓고 벌이는 일들이 보이는 거예요.  물건 팔려 아우성치는 사람들, 거지와 노예근성으로 하나님의 전지 전능한 능력으로 베푸는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들, 경건과 사랑의 탈을 쓰고 살아선 축복받고 죽어선 천국행 티켓을 파는 사람들....  혼돈스럽고 허전한 마음으로 이태리로 돌아왔어요. 공부는 가슴속에서 사라지고 '신앙이 무얼까?' 질문이 가득해 우울하고 외로웠어요." 나는 '신학교와 교회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미현은 성지순례에서 보고 경험을 했네!' 생각하며 홀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재내던 한 날 시스티나 성당으로 가 천장화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어요. '너도 내가 거룩한 시스티나 성당에 나체를 그린 것이 못마땅해?' 내 안에서 미켈란젤로가 질문하는 거예요. '너도 내가 성당에 죽기 살기로 그림 그린 것이 라파엘과, 레오나르도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승부욕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돈 때문에?  아니면 천부적인 재능을 뽐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려고? 그것들을 위해 내가 불구가 되며 4년 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해?'   

    이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늘어진 아들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피에타” 조각상이 떠 오르는 거예요.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왜 몸이 망가지는 아픔을 참고 견디며 찬장 벽화를 그렸는지, 상황이 그려지며 미켈란젤로의 마음이 보이는 거예요.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무덤에 조각 상을 만들어 달라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일어나는 성직자를 향한 실망감, 교황의 지팡이로 머리를 얻어맞고 느낀 분노, 장엄한 성전을 지어 놓고 그 위엄을 등에 업고 거룩하고 품위 있는 롭을 걸치고,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호위 호식하는 사기꾼들, 이들을 믿고 따르며 이득을 보려 경쟁하는 속물들, 사람들을 이간시키며 자신의 감정을 충족하려는 야비한 놈들, 기도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면 축복받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 믿어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무지몽매한 백성들.

     이 참담한 상황에서 '하나님, 당신은 무얼 하는 거예요?' 무릎 꿇고 초라하고 외로워 떨며 하늘을 향하여 항의하는 미켈란젤의 모습, 교회를 발가벗겨 거짓과 부정을 드러나게 하고 싶은 강한 욕구, 그러다  "정직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는 말씀에 '영혼이 나체가 되어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신앙의 확신을 얻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붓질하는 미켈란젤로의 심장이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이 신앙고백을 조각하고 그리려 시체를 해부하며 묘사 기술을 갈고닦은 열정이 그려지는 거예요." 


    잠시 숨을 고른 미현이 "그런데 이 신앙고백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천장화 나체에 팬티를 입힌 거예요. 미켈란젤로가 소리치는 듯했어요. '그것은 내 그림이 아니야!  발가벗은 영혼이라야 인간끼리도, 하나님과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단 말이야. 친구도 되고....  그런데 그림의 핵심을 지우고 내 그림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 하나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한 "천지창조"로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친구 되고 싶어 하는 목마름을 묘사하는데, 경쟁과 돈과 천재적인 기술로만 그림을 이해하려 하다니.... 노아의 거룩함과 술 취한 그림으로 인간의 연약 함에서 오는 이중성을 그렸는데, 그리고 위선의 가면을 벗고 나체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은총의 교제가 시작되는 진리를 이야기했는데, 노아의 충성스러운 복종만 강조하는 교회를 보고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알아?' 자기들도 믿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만들어 믿으라 강요하며 자기들에게 충성하게 만드는 도둑놈들을 향해 소리치는 미켈란젤로의 외침이 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어요.

    그리고 '너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데, 먼저 표현하려는 무언가를 가슴속에 품고 있기는 한 거야? 그것이 사랑이든, 진리이든, 아름다움이든 관계없이 말이야. 그것을 묘사하려 기술을 익히려고 로마에 온 거야? 작가의 진심을 보기 보다 유명세나 기술과 희소가치와 인간관계로 작품을 평가하는 세상인데, 넌 어떤 예술가가 되려고 해?' 미켈란젤로가 좋은 친구로 나의 영혼을 깨우는 듯했어요.  


    전도사님이 우리와 첫 만남을 할 때 하신 이야기가 생각이 났어요.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정직하게 내숭 없이 질문하고 답하며 생각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싶다고.' 난 펑펑 울었어요. 미안했어요. 당신께. 그리고 결심했어요. 미술공부보다 잃어버린 친구를 먼저 찾아야겠다고.... 모든 것들과 친구가 되는 블랙홀로 들어가기 위해 영혼이 나체가 되기로 했어요. 더 이상 아담과 하와처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지 않고, 나체에 팬티를 입히는  짓을 하지 않고,  맑은 영혼에 들려지는 진리와 사랑의 음성을 듣고 살겠다고 작정했어요.  


    중력의 근원을 풀듯 어려웠던 신앙이 숨쉬기처럼 쉬워 저 내 삶에서 일함이 느껴진다. 갑자기 방안이 더워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 거리며 '나도 너희들이 친구야' 속삭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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