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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익은 사랑의 색깔

옐로우스톤에서 만난 은하수

by 지준호

고운 주황색으로 물들었던 서쪽 하늘이 연해지며 대지는 검게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옐로우스톤 뒤뜰에 조개구름처럼 널려진 하얀 텐트들 중 하나에 새들이 둥지에 들듯 기어 들었다. 피곤한 몸을 고물거려 누울 자리를 만들고 두 팔을 쳐들고 기지개를 켰다. 아내에게 "굿 나이트" 하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두 다리를 쭉 펴고 누워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모았다.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른 꿈을 기대하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풀벌레들이 찌르르, 끼르르, 까르르 거리며 고향의 소꿉친구들이 문밖에서 부르듯 요란하게 울어대었다. 초롱초롱해진 눈동자에 호기심이 이글거렸다. 상체를 일으켜 아내를 훔쳐보았다. 아내도 덮었던 담요를 빼꼼히 들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레이저 빛이 부딪쳐 반짝하고 불꽃이 튀었다. 꿈나라의 기대는 사라지고 옛 추억들이 떠 올랐다. 우리는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 반딧불의 파란 불빛이 지어냈던 몽달귀신 이야기, 이성에 호기심 일어 친구에게 떼쓰던 이야기, 삐쳐 삐딱하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입을 삐죽이 빼고 시위하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으스스해 오싹거리다 얼굴이 빨개지며 깔깔거렸다.

얼마나 수다 떨며 낄낄댔는지, 이웃의 램프불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철든 아이처럼 난 손가락을 입에 대어 "쉬--"하곤 단잠의 방해꾼을 배출하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밖으로 기어 나갔다. 아!.... 검푸른 하늘에 수정처럼 빛나는 찬란한 별들이 빼곡히 박혔다. 난 그만 넋을 모두 빼앗겨 입을 딱 벌렸다. 허리와 고개를 함께 젖혀 중앙 하늘을 향하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 고운 주홍빛 여운을 띤 우윳빛 은하수가 살짝 기울어진 호수가 되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오른손을 흔들며 외쳤다.

"이것이 얼마만이야!"

"애물단지를 반세기 넘어서야 찾았군." 은하수도 쏟아져 내려와 나를 감싸 안을 듯 말했다.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거야?" 내가 물었다.

"네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 있었어." 은하수가 속상한 듯 말했다.

"그런데 왜 난 너를 보지 못했지?"

"너희들이 만든 오만가지 빛들이 합세해 방해를 하더라. 그리곤 크게 빛나는 별들에게만 망원경까지 동원하여 관찰하며 좋아할 뿐이고, 작고 희미한 것들이 모인 우리는 얼씬도 못하게 하더라. 몰래 짝사랑 바라보듯 할 수밖에 없었어." 은하수가 하소연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다 갸우뚱하곤 "그럼 칠흑 같은 스모키마운틴의 밤길에선 왜 나타나지 않았어? "라고 물었다.

"아! 그때 이야기..." 하고는 은하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난 꼬불꼬불 산길을 운전하다 느닷없이 휙휙 지나가는 암흑을 느꼈지. 갑자기 별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거 있지. 얼른 자동차를 세웠어. 그리고 모든 라이트를 꺼 버렸지." 난 그때인 듯 흥분하며 말했다.

"그리고 네 딸과 너는 자동차 밖으로 나왔지. 네 딸이 하늘을 바라보곤 '아빠, 쿨이다' 라며 감격의 탄성을 질렀고. 너는 사랑하는 딸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라도 준 듯 어깨를 으쓱 대었지, 부인은 무서워 빨리 들어와 불을 켜라고 자동차 안에서 보챘고."라며 은하수도 자신이 겪은 일처럼 흥분하며 말했다.

"헤일 수 없는 수정처럼 반짝이는 별들의 장관에 가슴이 터질 듯한 순간이었어. 그런데 그때 너는 왜 없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호기심 어려 동그래진 눈동자로 물었다.

"우리가 나타났을 땐 이미 넌 라이트를 켜고 신나게 산길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더라. 우린 먼지처럼 작고 연약해 쌩쌩하고 찬란한 별들이 나타난 뒤에 서서히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야."

"아....!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딸에게 별들의 찬란함을 보여준 보람에 취해 스모키 마운틴의 밤길을 콧노래 부르며 곡예하듯 달렸어."

"우린 우윳빛 사랑이 내려앉는 아름다움을 두고 떠나는 너를 보며 통증을 느꼈어. 작고 연약한 서러움을 맛보았지. 조금만 기다려 주었더라면 먼지처럼 작은 수많은 진심과 진심, 사랑과 사랑, 진리와 진리들이 어우러져 탄생한 은은한 호수의 신비를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시공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 사랑을 만나는 여행도 즐겼을 테고.... 아름다움과 사랑은 언제나 서로 끌고 끌려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이루어지게 하거든. 그래서 기도를 했어. 아름다움 속에서 너를 만나 '사랑의 색깔' 이야기를 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 옐로우스톤 뒤뜰에서 이제껏 기다린 거야? 텐트에서 나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피피 하러 나올 것을 알았지. 그런 나이가 됐잖아." 심술궂은 눈빛으로 은하수가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연한 주홍빛 여운을 띤 우윳빛인 거야? 다른 별들처럼 찬란하게 하얀빛으로 반짝거리지 않고."

"폭 익어서 그래."

"설 익은 것은 무슨 색인데?"

"진한 주홍색이지. 심장에서 쿵쾅거리며 바로 뿜어져 나오는 색깔. 그래서 종을 번식하게 하는 능력을 지닌.... 하지만 강한 욕망으로 상대의 심장도 내 것인 줄 착각하게 하는 색, 욕망인지 이기심인지 사랑인지 분별을 할 수 없어 눈에 콩깍지를 씌우는 색,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며 희생하고 섬기게 하며 멍청이가 되게 하는 색이지. 사랑은 상대를 진리 안에 들게 하며, 섬세한 감정으로 실오라기 같은 사정 모두를 살피며 행복하게 하는 것인데 말이야."

"아! 그래서 설익은 주홍색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되는 거구나."

"변덕쟁이이기도 해. 욕망을 채우지 못할 때 차디찬 미움으로 돌변하기도, 우아한 행복을 선물할 것처럼 보이는 명예, 돈, 거룩, 민족, 국가, 법에 노예가 되게 하여 삶을 시궁창에 쳐 박히게도 하지."

"그런데 어떻게 미숙한 주홍색 사랑을 폭 익은 주홍빛 여운을 띤 은은한 우윳빛 색깔로 익힐 수 있는 거야?"

"진리에 따르는 역사를 보는 안목, 사랑으로 보는 안목, 자신의 내면을 보는 안목을 크게 하면 돼.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노랗고 핑크빛 내는 달콤하고 화려한 유혹이 세상에 널브러진 줄도 모르고 사랑이 쫓는 것을 보는 동안, 오늘일까? 내일일까?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지. 어떻게 진리를 알게 할까? 그를 위한 최선의 지혜가 무얼까? 기도하면서. 그러며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지게 돼. 하지만 열정적이었던 주홍색이 연한 우윳빛으로 익어. 어머니의 풍만한 가슴이 품고 있는 우유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이야. 사랑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 이해시키고 설득하며 진리와 행복의 길로 인도하려면 미세하게 작고 부드러워야 하거든. 찬란한 빛을 내려다, 주홍빛 사랑을 하려다, 오해해 잘못된 길로 들어서 헤매다, 힘겹고 지친 사랑이 돌아와 품에 안겨 다시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게 하려면, 그래서 다시 반짝거리며 빛을 내게 하려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고 풍부한 영양을 공급해야 하거든.

"아....!, 그런데 넌 왜 연한 주홍빛 여운을 띤 거야?"

"창의력, 개성, 고유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행복을 누리게 하려는 노심초사가 가슴을 멍들게 하고, 방황하는 사랑을 기다리다 멍들고, 잘 못 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 멍들고, 유혹당하는 것을 보고 멍이 들었지. 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랑의 표식으로 검게 변하지 않고 주홍빛 여운만을 띠게 한 거야. 희생의 흔적인 상처를 영원히 기억하시려 주님이 흔적을 남긴 것이지. 그리고 연하고 부드러운 우윳빛과 어우러져 은은하고 고상한 품위를 유지하며 신비한 능력을 생산해 내시는 거야.

"그래서 연한 주홍빛의 여운을 띤 우윳빛 은하수를 만났을 때 사랑하는 손자, 손녀, 아들, 딸, 며느리, 사위의 얼굴이 그리움과 함께 나타났구나. 반세기 훌쩍 지난 고향으로 돌아가 대청마루에 앉아 봄나물을 다듬던 사랑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헛기침하며 기웃거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발가벗고 시냇가에서 함께 미역 감던 소꿉친구들까지 불러온 것이고."

"그것만이 아니야. 순결케 하고, 용기를 주고, 평안을 주고, 지혜를 주고, 희망을 주며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되게 하지. 꼰데를 상큼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는 인물로 변화시키며." 은하수가 덧붙였다.

"그런데 넌 외로워 보이는구나" 은하수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존을 위해, 의를 위해, 사랑을 위해 삶의 미로를 헤매다 보니 이렇게 됐어. 때론 별처럼 빛을 내려 벌버둥치기도 했지. 꿈에 부풀기도, 좌절하기도, 억울해하기도, 화를 내기도, 용서하기도, 사랑하기도, 꿈을 꾸기도 하면서. 하지만 이젠 그럴 힘이 사라져 버렸네. 그런데 열매가 없어도 괜찮고, 기운이 쇠해도 몸이 쭈글거려도 허망하게 느껴지지를 않네.... 너처럼 주홍빛 여운을 띤 우윳빛으로 폭 익혀서 독대하시려는가 봐."

"영원한 사랑의 품에 온전히 속하게 되는 길이지. 그리고 지금은 희미하나 그때는 사랑의 본체를 눈으로 보고 만진 듯할 거야....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게도, 번식의 동력이 되게도, 희생하고도 어깨가 으쓱해지게도,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게도, 한 없이 너그럽게도, 기다리게도, 참게도, 온유하게도 하는 주홍과 우윳빛이 어우러진 사랑의 정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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