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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사랑 이야기

민들레 씨앗 닮은 사랑

by 지준호

나른한 토요일 오후였다. 열세 살 난 손녀가 카우치에서 리모컨을 누르고 또 누르며 흥밋거리를 찾고 있었다. 난 옆에서 바뀌는 TV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손녀가 느닷없이 하얀 양털 러그로 펄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앉아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생기를 찾은 내 눈이 '뭐'라며 그녀와 눈맞춤했다.

"할아버지도 첫사랑 있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얄밉게 물었다.

"공주님이 첫사랑이 생겼나 보구나."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되치기 했다.

볼이 빨갛게 타오르며 "모르겠어, 사랑인지 아닌지"라며 고개를 숙였다.

"사랑은 본래 아리송하게 시작이 되지" 라며 난 연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첫사랑이야?" 그녀가 순간 매치 컷했다.

"아니" 하고, 난 얼른 검지 손가락을 내 입과 코에 1자로 대었다.

그녀는 움찔하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런데 왜 첫사랑과 결혼을 안 했어?"라며 반짝 눈에 빛을 내었다.

난 어물거리다 "첫사랑은 가슴에 아리게 간직만 하는 것이야"라고 얼버무렸다.

"그 첫사랑, 얘기해 줄 수 있어?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말해도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너그러운 눈빛을 보냈다.

난 엷은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첫사랑은 생각만 해도 달콤해"했다.

"그런데 왜 첫사랑은 아린 거라고 이야기했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데....."


난 멀리 지나 온 그 시간으로 돌아가느라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가 감미로운 추억으로의 여행을 훼방하며 말했다.

"어떻게 할아버지 첫사랑은 달콤해?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면서...."

"아리송하네...." 나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그때의 짜릿함과 아쉬움에 다시 눈을 감았다.


"말해 줄 수 있어?"

그녀는 했던 말을 뒤집고 "플리즈"하며 두 손을 모으고 내 입을 바라보았다.

"몇 살 때였어?" 궁금증 절제하기가 힘겨운 듯 보챘다.

"열세 살."

"똑같네, 나와. 사랑 고백은 했어?"

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용기가 없었어?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어?" 하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난 어리석은 순수함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녀도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걸 알았어?" 손녀는 검사가 피고인 심문하듯 파고들었다.

"알았을 거야.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그런데 왜?"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다 헤어지고 또 헤어지다 어느 날 난 학교 때문에 서울로 갔어."

손녀가 혀를 내미는 스모키처럼 말했다. "엘리스처럼?" (Smokie의 living next door to alice)

난 그녀의 얼굴을 떠 올리며 힘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할머닌 언제 만났어?" 손녀의 심문이 방향을 틀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스무 살 때였어."

"그땐 사랑 고백을 했어?"

난 초라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한숨을 푹 쉬며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했어?" 의아한 표정으로 손녀가 물었다.

"좋아서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났지."

"그러면서도 사랑 고백을 안 했어?"

"고백을 꼭 말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밟힌 지렁이가 꿈틀 하듯 대꾸했다.

그때 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랑이 무엇인지 확실히 몰라서 못했으면서....'

"용기가 없었던 것이지?" 눈을 흘기며 그녀가 말했다.

"위기는 없었어?" 목소리를 따뜻하게 바꾸고 물었다.

"위기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어!"

"어떤 위기였는데?" 하고는 그녀가 "플리즈" 했다.


크게 숨을 몰아 쉬고 말했다.

"잘 보이고 싶었어."

"할머니에게?"

"응."

"그래서?"

"뻥쳤어."

"무엇을?"

"우리 집은 부자고, 할아버지 아빠는 훌륭한 분이라고...."

"부자도 아니고 할아버지의 아빠는 훌륭한 분도 아니었는데?"

"가난한 농사꾼이었어.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정직하지만 학교는 다니지 않은...."

"그래서?"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가 물었다.

"그 후로 난 뼈 없는 동물이 되었어. 몸과 마음 모두가 흐느적거리는..... 생활하다 그 생각이 떠오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몸에 있는 에너지가 싹 사라져 버렸어. 왜 그랬을까? 아이고, 바보, 하며 후회를 했지. 그런데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잖아. 탄로 나기 전에 헤어질까 많은 시간 고민을 했어."

"고백하지 그랬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그러려니 실망하는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만나면 좋고 그 생각이 떠오르면 괴롭고." 난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느 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인사하고 싶다는 거야."

"할머니가?"

난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서?"

"그러자고 했지."

"거짓말한 것을 고백하지도 않고?"

"응."

"탄로 날 텐데?" 위기를 느껴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고백하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았어."

"그래서 할머니가 아빠 아버지 어머니 뵙고 인사 잘했어?"

난 말없이 고개만 끄떡거렸다.

"그때 할머니 표정은 어땠어?"

"예의 바르게 인사를 잘했지. 하지만 실망한 내색이 내 눈에 보이는 거야. 가슴이 아렸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순간이었어. 미안해 안절부절못했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어. 그냥 엉엉 울고 싶었어."

"그리고 서울로 왔어?"

"응."

"할머니가 가만히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어."

"할아버지는 어떻게 했어?"

"뼈도 뇌도 없이 흐물거리는 지렁이가 되었지. 그리고 며칠 지나고 만났어. 난 판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초라한 피고인이 되었어."

"뭐라고 할머니가 판결을 했어?"

"헤어지자는 거야."

"그래서?"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난 사형수가 최후 변론하는 심정으로 말했어.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맺은 인연을 파기할 수 없다고..."

"그러니 뭐래?" 궁금해 동그래진 눈으로 내 눈을 주시하고 그녀가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또 만났어?"

난 고개를 끄떡이고 평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났어. 그러다 보니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 그리고 결혼을 했어. 하지만 실망했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후회까지 달라붙어 아림이 배가 되었어."

"할머니와의 사랑이 첫사랑 같은데...."

"모르겠어 어느 것이 첫사랑인지." 이어 덧붙였다.

"그런데 또 하나 첫사랑 같은 것이 있어."


"또?" 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내 입을 응시하였다.


"세상에 태어나 첫 기억으로 여겨지는 영상 하나가 내 가슴속에 있어. 네 살이었다고 생각이 되는...."

"네 살 때 첫사랑을?" 손으로 턱을 괜 채 듣던 손녀가 미간을 찡그리고 물었다.

"모르겠어. 그것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손녀가 나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대지가 온통 흰 눈으로 덮인 한 겨울의 새벽이었어. 달빛과 눈빛이 모아져 문창호를 뚫고 들어와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고 있었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나 그리고 동생, 여섯 식구가 모여 촛불을 밝혀 놓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옆에는 튀밥이 가득 담긴 자루와 사과가 담긴 바구니를 두고서."

"새벽에?"

난 고개를 끄떡이곤 말을 이었다.

"모두가 설렘 가득한 눈망울들이었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어. 난 졸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꾸뻑거리다 놀라 깨고 다시 꾸벅거리다 놀라 깨길 하고 또 했어. 그래도 자지 않고 버텼어."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또 들렸다.

"바로 그때였어.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모두 숨을 죽였지. 졸음도 사라져 버렸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은 분주하였어. 다시 밖이 고요해졌어. 우리는 서로 눈짓 손짓으로 '조용'을 말했어. 그때 '딱딱딱' 막대기 부딪치는 소리가 세 번이 났어. 그리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찬송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는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는 용수철에 튕겨지듯 활짝 문을 열고 마루로 튀어 나갔어. 나도 잠자고 있는 동생을 돌아보곤 그 뒤를 따라 나갔어. 달빛과 눈빛과 호롱불에 비친 그들은 분명 천사들이었어. 중앙에 선 이가 누우신 아기를 안고 있는 것 같았어."

"예뻤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질 않았어. 마루에 선 식구들이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목청이 터져라 따라 부르는 동안 난 그림자에 가린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찾았어. 하지만 보이지가 않았어. 그런데 그때 세상 모두가 하나가 된 것 같았어. 다시 우리는 '고요한 밤 거룩 한밤'을 불렀어. 잠자고 있는 아기가 깨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찬송이 끝나자 식구들이 봉당으로 껑충 뛰고 다시 마당으로 뛰어내렸지. 그리고 얼싸안고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라며 웃고 떠들며 인사를 했어."

"할아버지도 했어?"

"아니, 아기 찾느라 움직일 수가 없었어."

"마루에 선 채로?"

"마당으로 가는 사이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찾았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없었어.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고 있는 그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느껴 꼭 보고 싶었는데, 아련한 사랑만 가슴속에 남기고 가버린 거야."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 아기 예수에 대하여 알고 싶고 보고 싶은 욕구가 솟았어. 땅의 상태는 아랑곳없이 돋아 오르는 민들레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또 물었지. 본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이 확신에 찬 듯 답했어."

"뭐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낮고 천한 사람들보다 더 낮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거야. 당연히 의심과 질문이 커졌지.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 그럴 필요가 뭐 있어."

"그래서...." 손녀가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따졌지.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그분도 어린 시절에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또 하고 질문하고 또 했다는 거야. 그러며 토론까지 벌였다는 거야. 나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 더 보고 싶어지는 거 있지. 그런데 사람들은 내 질문에 답도 토론도 하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라고 했어. 내 속에선 '뻥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리고 허전해졌어."


"그렇게 울적해있을 때 새 힘이 용솟음치고 그분이 더 사랑스러워지는 이야기를 들었어."

"어떤 얘긴데?"

"교회의 성직자들과 학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며 미워하였대. 답해주지도 토론도 하지 않고, 믿으라고만 하면서, 다 아는 듯 거룩한 듯 거들먹거리며, 사람을 차별하며 순종하고 봉사하라고 했던 이들을 향해 들었던 내 마음이 그랬었거든."

"그런데 다음 이야기를 듣고 또 갈등이 생기는 거야."

"무슨 얘긴데?"

"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거야. 한숨이 나왔어."


손녀도 아리송한 눈빛으로 한숨을 쉬고는 내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음 이야길 듣고 마음이 편안해졌어."

"어떤 얘기였는데?" 귀를 쫑긋하고 그녀가 내 입을 바라보았다.

"가난하고 무지하여 죄짓고 사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들의 친구라며 산에서 들에서 집에서 함께 먹고 마셨대. 사람들은 용기와 지혜를 얻고 병든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 점점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거야.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죄인의 괴수라며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대. 난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어. 그리고 맥이 빠졌어. 그래서 허황된 얘기라 치부하고 그럭저럭 나 좋은 대로 지내는데 죽었던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거야."


"소설이네." 그녀가 허탈한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허황된 얘기라고 여기고 잊으려 했어. 그런데 질문이 속에서 끊임없이 또다시 이는 거 있지. '왜 말구유에서 태어난 것일까? 천군천사들이 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오셨으면 그런 억울한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왜 전지 전능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터무니없이 당하신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일까? 살아나신 그분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우울해지던 어느 날이었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가 이 세상에 와서 말하고 행동하고 당한 일들 하나하나에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이 느껴지는 거 있지."

"어떻게?"

"피조물인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똑같이 여기는 사랑,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포기하고 보여주고, 이해시키고, 설득하며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어리석고 욕심에 갇혀 죄지어 그물에 걸린 새처럼 버둥거리는 우리를 자유케 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려는 사랑, 진리를 깨달아 높고 크고 넓은 세계를 활개 치며 창의력과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게 하려는 사랑, 우리 안에 계시며 잘못된 길로 갈 때 '고개를 젓고', 용기를 잃었을 때 '괜찮아 다시 해 봐', 마음이 아플 때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 주는 사랑'의 이야기가 모든 그의 삶 속에 숨겨있는 것을 알았어."


"그것이 첫사랑이네."

"아니, 사랑의 어머니 같았어."

"사랑의 어머니?"

"하얀 날개에 씨를 태워 길가에, 잔디밭에, 잡초 가운데 떨어뜨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민들레처럼,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온 세상에 사랑을 끊임없이 뿌리는 것을 알았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이 시와 때를 가라지 않고 이는 것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랑이 더러는 미움받는 잡초처럼, 더러는 밥상 위에 올라오는 쌉쌀한 반찬처럼, 더러는 약초처럼, 더러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예쁜 털에 씨를 태워 여기저기 뿌리지. 사랑의 음성이 들렸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을 말하고 사람들의 심장 속에 있는 진실을 듣고 이해하며 네 안에 있는 사랑의 음성을 잘 듣고 진리를 따르면 사랑받는 아름다운 민들레처럼 된다고.... "


"진실이 어머니가 주시는 사랑의 우유네." 그녀가 평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 진실을 먹고살게 하려고 촉각, 시각, 후각, 청각, 지각과 양심을 주고 말하고 듣고 이해하게 하신 것 같아. 아름다운 사랑을 누리게 하려고."


나의 첫사랑 이야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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