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바라는 이들을 향한 소설을 쓰기에 앞서
처음 세상에 나온 날, 난 포근한 어머니 품에서 젖을 물고 천국인양 행복을 누렸다. 비록 눈도 뜨지 못한 갓난아기여서 기억조차 없지만 상상만 해도 모난 생각들이 둥글둥글해진다. 그러던 난 눈 코 귀 그리고 입과 손가락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자 세상에 흩뿌려진 수많은 행복을 허둥대며 좇았다. 하지만 아뿔싸, 힘겹게 잡은 행복들이 새로운 욕구와 비교 의식에 쫓겨나 햇살 앞의 이슬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결국 난 또다시 행복을 찾아 우왕좌왕 길을 잃고 헤맸다. 그러는 사이 행복이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더러의 불행은 행복의 뿌리도 되었다. 난 그만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인생은 고통'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솔깃해 허탈해하다 하나님 앞에 나가 은혜를 구했다. 그런 내게 '하나님은 왜 전지 전능하신 능력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느냐'라는 항의가 내면에서 일었다.
행복,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내 인생은 행복이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왜일까?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까지 하는데.....
행복을 누리기 위해 행복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인지, 반 발자국 앞에서 손짓하며 잡힐 듯 잡힐 듯 도망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옛날의 왕보다 몇 배 더 화려하고 편리한 삶을 살면서도 우울해하는 이유를 아는 것이 먼저다.
인간은 우주와 공기 그리고 음식과 생명의 관계, 부부와 부모 자녀 그리고 형제자매 친인척과 존재의 관계, 이웃과 친구와의 사회적 관계, 지나온 과거의 산물인 역사와 문화와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들과 얼마나 원만하게 아름다움과 신뢰와 사랑과 지혜를 주고받는지, 그 가운데서 존재가치를 느끼고, 성취감을 맛보는지에 따라 행복의 양과 질이 결정이 된다.
이를 위해 내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부끄러운 속내와, 원하는 바와, 진리를 생명의 주인과, 상대하는 이에게 털어놓으며 소통하고 있는지. 그러며 훼손된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지, 불의를 이기고 정의로운 일에 동참하는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는지, 진리를 깨달아 삶을 편리하고 가치 있게 하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아름다움을 보는 눈, 세상의 실체와 진리를 바르게 보는 눈, 나 자신과 내면세계를 보는 눈이 밝아야 하는데..... 남의 눈, 자존심, 이기심, 돈, 명예, 권력과 떠돌아다니는 뜬금없는 풍문 등이 우리 눈에 콩깍지를 씌운다.
이렇게 우리 눈에 씌워진 콩깍지를 제거하시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설 자리를 바로 보고, 그에 필요한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말과 행동하길 원하신다. 이 사랑이 열매를 맺기 위해 예수 앞에 나가 맑고 깨끗한 거울 앞에 서듯 순간순간 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진심을 고백하며 진리와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며 예수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모난 내가 둥글둥글 해지는데, 난 이 사랑을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누린다.
난 먹고 마시고 싸고, 고개 젖혀 하늘을 향하고 맑은 공기와 파란 색깔을 코로 눈으로 즐기고, 우주에 널려진 아름답고 신비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내면에서 응원하는 힘으로, 당당한 말과 행동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짜릿함, 존재가치를 느끼는 뿌듯함, 정의가 힘겨운 싸움을 싸워 불의를 엎어치기로 패대기치는데 한 역할하며 천국에서 누릴 행복을 맛본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허둥거렸던 날들, 욕심에서 온 목마름으로 얼굴 화끈거리게 하는 이야기를 예수의 품 안에서 소설로 적는다. 생수를 마시고 자유로워진 난 작고 크고 시시하고 중요한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천국의 모형으로 만드는 이야기도 있다. 행복을 바라는 사랑하는 이들이 글을 읽고 함박웃음을 짓고, 유익했다는 칭찬을 덤으로 받을 상상도 한다. 예민하고 날 섰던 마음이 이미 흠뻑 물오른 새싹처럼 생기 있고 보들보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