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와 글

나의 영어 원서 도전기 1

무식하고 미련하게 글자만 줄줄 읽어대는 무작정 영어책 읽기

by Magic Finger


오랜만에 영어책을 집어 들었다. 주디 블룸의 <퍼지는 돈을 좋아해>를. 솔직히 말하자면 오랜만에 영어 책을 펴들면서 나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는 향상되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 쉽게 영어책을 읽을 수 있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 그렇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글자만 줄줄 읽어댔다.


나의 영어 원서 읽기란 아주 미련한 방법이어서 이해할 때까지 읽고 또 읽는 방식이다. 사전을 찾아가며 꼼꼼히 읽어야 실력이 는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많은 단어를 모르다보니 단어를 일일이 찾아가며 읽기에는 시간도 너무 가고 그렇게 하다 보면 나는 금방 지쳐버린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무식하고 미련하게 이해할 때까지 읽고 또 읽는 방법을 택했다.


사실 나의 영어 원서 도전은 고등학생 때 무모한 객기로 시작되었다. 서점에 들렀다가 영어 원서를 싸게 판다는 말에 홀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구입했다. 설마 언젠가는 내가 영어 소설을 술술 읽는 날이 오지 않겠냐는 막연한 기대와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날이 오리라니,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지만 그때는 조금만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나는 당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쯤은 반드시 원서로 읽어봐야지 라고 멋모르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얼마 뒤에는 <명탐정 파커파인>도 구입했다. 그렇게 책만 사고 또 사며 지내다가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어 살기에 바빠지면서 자연히 영어 원서는 내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책을 읽을까 책장을 훑어보는데 바로 그, 예의 그 <톰 소여의 모험>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 책을 꺼내 훑어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놓고 앞에나 좀 펼쳐 보았을까 싶었는데 책에는 몰랐던 것으로 추정되는 단어들에 형광펜으로 빼곡히 칠해져 있었다. 그것도 책 거의 끝까지.


앗! 나는 그만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끈기 있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전혀 없다. 더군다나 이 책을 이해하지도 못했을텐데, 그렇다면 얼마나 지겹고 꾸역꾸역 읽어냈을텐데, 그런 고통스럽던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나의 영어 원서 도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주제 파악을 해서, 글자가 크고 얇은 어린이 동화책으로 시작했다. 장르니, 작가니, 이런 것에 상관 없이 백 쪽 가량의 어린이용 책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미국이나 캐나다를 가면 헌책방에 들러 백 쪽짜리 어린이용 책을 많이 사두었고, 서점에서 할인하는 책을 사서 읽거나, 도서관에서 영어 원서를 빌려준다는 것을 알고는 도서관에서도 빌려 읽었다.


그때까지 작가나 작품에 상관 없이 읽어대다가 어쩌다 헌책방에서 로알드 달과 주디 블룸의 책들을 운좋게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책들을 읽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 책들은 이전에 읽던 책들과 달랐다.


내용을 모른 채 무작정 읽는 것도 유명한 작품을 읽는 것이 훨씬 덜 힘이 들었다. 문장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는 단어들을 드문드문 읽으며 내용을 짜깁기 하는데 그 과정이 좀더 재미있고 유익했다. 로알드 달의 동화는 어휘가 다채로와 읽기는 힘들지만 훨씬 많은 단어들을 접할 수 있고 또 흥미로운 줄거리와 그림이 매력적이었다. 주디 블룸의 이야기는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통통 튀는 매력이 느껴졌다.


그 뒤로부터는 그래도 조금더 유명하다는 동화를 골라 읽게 되었다. 또한 명작동화들은 연령대별로 다양하게 엮어져 나와 내 수준에 맞게 이 동화책들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톰 소여의 모험>이나 <빨강머리 앤>, <로빈슨 크루소> <올리버 트위스트> 등 백 쪽 가량으로 엮어둔 책을 읽었고 <노인과 바다>,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이야기가 짧은 고전 명작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명작동화는 누구나 내용을 익히 잘 알고 있어 무작정 읽기에도 유익했다.


문장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내 수준만큼 배울 수가 있었다. 어린이 책이라면 쉽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린이 영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터라 매우 힘에 부쳤다. 그러다가 로알드 달의 <내 친구 꼬마거인>을 읽고 완전히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어려웠는지 내용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가 지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후로는 한동안 영어 원서를 멀리했다.


시간이 흘러 도서관에서 우연히 <기린과 펠리칸과 나>를 보게 되었다. 또다시 엄청난 지끈거림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빌려왔는데 왠걸 예상과 달리 그리 힘겹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내용이 경쾌하고 줄거리가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무작정 원서읽기에 돌입했다.


이제는 단계를 조금 높여서 이 백 쪽 가량의 명작 동화에 도전 중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보물섬> 등을 읽었지만 역시나 내용은 오리무중이라고 해야겠다. 또 언제까지 이 단계를 계속 해야할 지 모른다. 이만큼 읽기까지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와 뉴욕이 자랑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을 원서로 읽어낼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그 날이 오리라고 더 이상 꿈꾸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꾸준히 읽어낼 것이다. 당분간은 이백 쪽 분량의 어린이 책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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