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쏘아올린 명곡
얼마 전 넷플릭스에 올라와 보게 된 <나의 아저씨>는 많은 사람들의 극찬대로 과연 잘 만들어진 인생 드라마였다. 명장면과 명대사들이 많았지만 특히 인상적인 씬이 있었는데, 술집 주인 정희(배우 오나라)가 오랜 친구이자 단골손님인 인물들과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가게 문을 닫고 쓸쓸한 일상으로 돌아온 그녀가 비틀거리다 엎어져 코피가 나면서도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세면대 앞에 선다.
"엎어질 순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씻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제정신인 겁니다.
어디서 피가 흘렀을까요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빨래를 하면 그렇게 취한 게 아닙니다.
그날 입은 걸 빨면, 난 아직 괜찮은 겁니다.
괜찮은 겁니다. 제정신인 겁니다.
씻었고, 속옷도 빨았습니다.
나는. 오늘 일과를 다 했습니다.
난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난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시체처럼, 자겠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 수 없다.
고백하자면,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지친 일상 뒤에 술을 마시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그대로 뻗어버린 적이 몇 번 있다.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장면이 약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술 취한 그녀가 존경스럽게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논리로 보자면 나는 괜찮지도 않고, 제정신도 아니며, 망가진 사람이었다. 부끄러웠다.
40대 미혼의 술집 주인 정희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이랄까 느끼는 바는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호방하고 유쾌하고 자유로운 영혼. 그래서 (친근하게) 막 대해도 되는 사람. 나도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그녀에게서 그 정도 선의 캐릭터만을 봤는데, 그렇게 취해 엎어져 코피가 터져도 속옷을 빨고,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하며 '난 망가지지 않았다'라고 하는 이 장면 속에서 삶이라는 경기(race)에서 이탈하지 않으려 최소한의 줄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존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모성애'라는 왕관 없이도 숭고해 보였다.
보통의 일상을 살아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매일 똑같은 일들을 해내고, 또 살아낸다는 것에는 시지프스가 커다란 돌을 밀고 밀어 산을 오르고, 다 올라왔다 싶으면 그 돌이 굴러 떨어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을 무한 반복하는 것같은 막연함과 지겨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구하려 하기 전에 이불부터 정리하라'는 유명한 말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본적인 룰-나와의 약속을 매일 지키는 것이 어쩌면 제일 어렵고 대단한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런 장면도 있다. 정희네 술집에서 동훈(배우 이선균)이 정희와 술을 마시며 지안(배우 이지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어떤 애가.. 자기가 삼만 살 이래."
휴대폰 도청을 통해 엿듣고 있던 지안은 뜻밖에 동훈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에 걸음을 멈추고 듣기 시작한다. 정희가 되묻는다.
"삼만살이가 뭐야..?"
"나이가 삼만 살 이라고. 수없이 태어났을 테니까 모든 생을 다 합치면 삼만 살 정도 되지 않을까.. 왜 자꾸 태어나는지 모르겠다는데. 난 알아. 왜 자꾸 태어나는지. 여기가 집이 아닌데, 자꾸 여기가 집이라고 착각을 하는 거야. 그래서 자꾸 여기로 오는 거야. 어떡하면 진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지 않고."
"....... 야, 이 바보야. 너 진짜 몰라?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몰라? 어? "
".....?"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응?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노래하며)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이렇게나 명쾌하게 정희는 답을 내놓는다. 그녀가 노래로 부르기 전까지는 나는 이것이 심수봉님의 <백만 송이 장미>의 가사라는 것도 몰랐다.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어릴 때 지나가다 듣게 되면 그저 통속적인 어른들의 음악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심수봉 <백만 송이 장미> 가사 중 일부.
백만 송이나 되는 장미를 피워야 고향 별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지령을 받고 방출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에야 장미 하나를 겨우 피워내는데, 그 짓을 백만 번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지구별을 여행하는 동안 백만 송이나 되는 장미를 피워낼 수 있을까. 어떤 지령을 받은 신분인 주제에 먹고 마시고 행복하게 누리고 살기만 원했던 나를 그분은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셨을까. 한 송이, 두 송이.. 착실하게 매일 피워내다 보면 어쩌면 나, 성공할 수 있지도 않을까?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