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들을 자유
몇 년 전쯤에 읽었던 미국 뉴스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었는데, 고학력자일수록 콜드플레이의 음악을 선호하고 학력이 낮을수록 비욘세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상하고 재미없는 뉴스가 아닐 수 없어 대충 읽고 넘겼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팩트 체크를 하기 위해 다시 검색해보았는데, 내 서치력이 부족한 건지 오래되어 기사가 삭제된 것인지,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온다. (공교롭게도 그 리서치 기사 몇 년 후, 비욘세와 콜드플레이는 Hymn for the Weekend라는 곡으로 화합하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90년대 초중반, 사랑해 마지않던 채널 [v]에서 브랜디와 모니카의 뮤직비디오를 본 이후 나는 90년대 힙합, R&B 등의 흑인음악과 사랑에 빠졌다. 당연히 비욘세는 나의 여왕이었다. 훗날 대학생이 된 나의 전공은 클래식 작곡으로, 여왕의 음악과는 거리가 좀 멀었던 현실적 선택이었다. (내 안에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인격도 있다.) 그런데 같이 음대 입학 준비를 하던 친구는 그 대중적인 비욘세라는 이름을 모를(!) 정도로 클래식 음악만 들었다. 음대에 진학해서도 친구들의 분위기는 대중가요 중에서도 점잖은 토이나 성시경을 좋아하는 부류나 인디적인 홍대감성을 좋아하는 부류,정도로 나뉘었다고 하면 좀 느낌이 전달될까. 나는 내가 아싸라는 생각에 대놓고 아싸짓을 하며 대학생활을 마쳤다.
사회인이 되고부터는 만나는 남자에 따라 음악의 취향이 바뀌었다. 남자를 만나다가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음악을 만나려고 그가 내 인생에 잠시 발을 디뎠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중에는 물론 콜드플레이도 있었다.
나는 여러 장르를 두루두루 사랑하는 메뚜기였다. 클럽에서 아는 작곡가가 드럼 앤 베이스 디제잉을 하는 날은 내 무릎마디며 도가니가 걱정될 정도로 하이힐 신고 발을 구르며 춤을 췄고, 20대 후반~30대를 접어들면서 제대로 즐기게 된 EDM 중에서도 딥 하우스나 유명 디제이가 음악을 트는 날만 골라 진짜로 '음악만 들으러' 클럽에 갔으며, (Diplo가 웃통을 벗으며(!) 디제잉을 하던 어떤 날 거기 있던 나를 사랑한다) 오래된 바이닐을 틀어주는 강남의 '전자신발'이나 해방촌의 '서울 바이닐'같은 곳에도 출몰했더랬다.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에는 회사 직원들과 치킨에 각종 술들을 잔뜩 가져가서 흑역사를 쓸 때까지 놀았다.
미국에서 산지 몇 년 정도 된 지금 생각해보니, 적어도 한국에는 '각종 장르를 듣는 한국인들'만 존재했다. 암만 날고 기는 별종이라고 해도 같은 한국인인 것이다. 그게 얼마나 맘편한 것이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여기서 살며 가까이서 보니 흑인들은 거의 흑인들의 음악만 듣고 백인들은 거의 백인들의 음악을 선호해서 인종이 잘 섞이지 않거나 만약 섞인다면 피부색만으로 두드러지게 티가 났다. 스포티파이로 After 7의 음악을 듣다가 시카고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당연히 가야 한다며 티켓팅 직전까지 갔으나 흑인들로 가득한 공연장 속에서 눈치 보며 한껏 쫄보가 된 동양인의 나를 상상하고는 그만뒀다.
서울에 살 때는 그곳을 '취향이 획일화되는 곳', 내지는 '취향을 강요받는 곳'이라며 불평했다. 그러나 개인의 취향이 '개별적으로' 존중되는 곳은 오히려 서울이었다. 미국에는 인종으로 나뉘는 스테레오 타입, 그러니까 지독한 편견과 그것을 깨지 않는 관성만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개중에는 예외의 케이스들이 꼭 1-2%씩은 있지만 이것은 논외로 한다.) 비욘세와 콜드플레이로 대표되던 고학력이니 저학력 타령은 결국 흑인이냐 백인이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오늘도 남편과 육퇴(육아 퇴근) 후 한 잔을 했다. 배달시킨 페르시안 음식에 집에 있던 와인이 잘 어울려 너무나도 흡족했던 저녁식사였다. 발코니의 야외 테이블에서 먹자고 한 남편을 칭찬했다. 6월 답지 않은 선선한 바깥 온도에 미시건 호수의 물비린내가 습한 바람에 실려와 모든 번뇌를 지워주었다. 베이스가 묵직한 블루투스 스피커로 듣는 BGM은 내가 선곡한 After 7의 음악들이었고, 한국계 미국인인 남편도 이 집 BGM 맛집이라며 맘에 들어했다.
좋게 말하면 모든 편견과 개소리는 초월해버리는, 나쁘게 말하면 열외가 되어 (아웃사이더가 되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자유의 밤이었다. 이런 태도로 일관하여 이민자로서, 아시안으로서, 여성으로서 주눅 들지 않고 비욘세니 콜드플레이니 상관없이 끌리는 대로 들으며 살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