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은 난리 '부루스'가 아닌 감격의 '블루스'
몇 안 되는 나의 브런치 글 제목만 보아도 아실 수 있겠지만 나는 육아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엄마다. 살림 이야기나 결혼 생활, 심지어 친한 지인에게도 잘 털어놓지 않는 흑역사에 대해 얘기할 수는 있어도 마치 금기라도 되는 양 육아 이야기만큼은 하지 않았던 것. (앞으로도 그럴 예정) 자신에게는 우주의 체험이나 다름없는 아이와의 일상은 매일매일이 놀랍고 사랑스럽다. 반면 자질구레하고 고통스러운 희생도 감내해야 하는 만큼 육아에 대한 주제에는 글감이 풍부하다. 그런데 나는 그 얘기는 혼자만 보는 일기장에 양보하고 여기에서는 '육아만 빼고 잡다한 것에 대해 다 얘기하는사람'이고 싶다. 태생이 청개구리라서 그런가 보다. 사실 다른 엄마들이 너무나 멋지게 육아에 대한 얘기를 풀어주시기에 '굳이 나까지 보태지 않아도..' 하며 주눅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쓰지만 않을 뿐 육아 이야기는 웬만하면 거의 다 읽어보고 책으로도 사서 볼만큼 성실한 '독자'다. 그런데 오늘은, 써야겠다. 오늘 나에게 일어난 사소하지만 놀라운 일에 대해.
일요일 저녁, 남편은 얼려둔 킹크랩을 찌고 나는 냉소바를 만들어 함께 먹었는데, 아이는 먹으라는 게살은 안 먹고 브로콜리 조금에 메밀국수만 줏어 먹었다. 먹는 게 반, 버려지는 게 반이었다. 후식으로 요거트에 블랙베리를 잘라 섞어 먹였는데 자꾸 본인이 직접 떠 먹겠다고 난리였다. 아이의 얼굴과 옷, 아기용 식탁의자와 그 주변은 자연스럽게 엉망(이라고 쓰고 disaster라고 읽는다)이 되었다. 약간의 소화 시간을 주고 샤워실로 직행했다.
나는 아이를 목욕시킬 때 항상 음악을 튼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거나 아이가 좋아하는 어린이용 음악들이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 중 아이가 커서 들어도 좋을 만큼 추천(?)하는, 선하고 밝은 느낌의 곡들만 모아놓은 리스트를 골라 랜덤으로 틀었다. ㅡ나는 스포티파이를 이용해 음악을 듣는데, 선곡 장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빅데이터에 근거한 알고리즘이 노래 골라주는 기술에 만족한다. 하지만 음악 프로듀서 밑에서 A&R(큐레이터 혹은 구성작가라고 생각하면 쉽다)로 일했던 경험 때문인지, 내가 직접 플레이 리스트를 만드는 것 또한 아주 좋아한다.ㅡ 여느 아이들처럼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아기는 내 플레이 리스트를 들으며 흡족한 목욕을 마쳤다.
목욕이 끝나고 방에 데려가 온몸에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입혔는데 그분은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때, 듣고 있던 아이폰 스피커에서 A Lover's Concerto가 흘러나왔다. 아이를 들어 올려 안아서 어르고 있던 차에 이 곡 전주의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이는 모든 칭얼거림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게 뭐지?!' 하는 올빼미마냥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본다. 바이올린이 쏘아 올린, 부드럽지만 강렬한 전주가 끝나면 마치 런웨이 위의 모델이 성큼성큼 걷는 듯 활기찬 리듬의 드럼이 맞받아치고 그 위로 보컬의 진한 음색이 더해지며 (영화 '접속'의 OST로 유명했기에 나에게도 꽤 익숙한) 음악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신이 나버렸다. 나는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애의 달걀만 한 주먹을 쥐어 드높이며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음악에 따라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움직이다 보니 블루스를 추는 한 쌍처럼 되었다. 아이는 개구진 웃음을 지어 보이고 신기하다는 듯 내 눈을 계속 계속 바라보았고, 그렇게 우리는 그 음악에 맞춰 손을 잡고 왈츠를 추듯 춤을 추었다. 순간 너무 믿을 수없이 행복해서 울컥하는, 당시의 상황을 겪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오글거리고 진부하지만 에라이 졌다,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벅찬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당황스러웠다.
"하루 종일 힘들어도 아이가 한 번 웃어주면 다 사르르 녹아요"하고 해사하게 웃으며 인터뷰하던 유튜브 속 아기 엄마의 얼굴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나는 왜 저런 종류의 어머니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패잔병마냥 허탈해하던 나였다. 나도 아이가 웃어주면 물론 좋긴 좋은데, 너무 사랑하는데, 그건 그거고 피곤한 건 피곤한 거였다. 그런데 육아 20개월 만인 오늘 그 진기한 경험을 한 것이다.
오늘 하루치의 피로 해소? 놉. 20개월 전 육아 시작 후 지금까지의 피로 타파? 노놉. 아예 "태어나길 잘했다는" 종류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도의 행복감이었다. 뇌에서 극강의 세로토닌과 엔도르핀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약 2~3초간 체험한 기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순간, 처음으로 혼자 걷고, 처음 엄마! 하고 불렀을 때의 환희와는 또 다른 종류의 따스함이었다.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것까지는 내가 허락 못해.)
전주만 들어도 눈물샘이 자극되는 Luther Vandross- Dance with my father의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Beyonce가 실제 아버지 Matthew Knowles와 함께 우아한 춤을 추는 장면이 있는데, 슬라이드쇼처럼 보여지는 루더 밴드로스의 사진들도 좋았고, 많은 유명인이 자처하여 나오는 비디오였지만 비욘세의 팬이었던 나는 그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연인이 추는 종류의 춤을 아빠와 추면 따스해지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같다.
어느 정도의 수유기간을 지나 묽은 쌀미음을 떠서 먹여주면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삼키는 연습부터 하던 꼬물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무려 냉소바를 손으로 집어 우걱우걱 먹는 꼬마대장이 됐는데 난장판이 된 식탁의자쯤이야. 사랑을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이듯 딸아이와의 그 몇 분이 지난 20개월의 나의 눈물과 지난 삼십 n 년 간의 이불킥들을 다 청산해 주는 것만 같았다. 지난 내 모든 선택과 행동들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을 테고,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밤들이 꽤나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오늘 나의 딸아이와 함께 어설프지만 신명나게 추었던 몇 분간의 춤, 그 교감으로. 앞으로도 산 하나를 넘고 나면 더 큰 산이 나타나겠지. 하지만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오늘 같은 날도 불쑥불쑥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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