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장학금
너무 오랜 만에 글을 쓰려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써야할 지 모르겠다.
반말로 써도 될지 아니면 전처럼 존대말로 써야할 지.
브런치에 써야할 지 아니면 트위터에 써야할 지.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브런치의 내 글을,
그러니까 내 속마음을 읽을 사람의 숫자가 아주 적을 것이므로 이곳에 쓴다.
그렇다.
브런치가 세상 특별해서 여기 쓰는 건 아니다.
그냥 이곳은 기록을 남기기 좋은 곳이며,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 곳은 특성상 긴 글을 읽는 사람이 주의깊게 읽어줄 것 같다.
소위 말하는 행간의 뜻을 헤아려줄 것만 같다.
아, 쓰고 보니 특별한 곳이군.
나는 8월에 시카고의 한 사립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우선 1년 할 예정이다. 대학원 수업 중 몇 개를 듣는 Non-degree 과정이다.
주립대의 대학원에 합격했는데 이것은 1년 미루기로 했다.
대학원 학비는 내돈내산 공부이고 이 Non-degree 코스 학비는 내가 찾아서 지원한 장학금으로 전액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책 값도.
마치 여행을 하다 어떤 레스토랑에 불쑥 들어가 입맛에 꼭 맞는 밥을 먹고 흡족한 것처럼,
무작정 떠난 여행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아주 친절한 사람을 만나서 더 좋은 길을 안내 받은 것처럼,
그런 기분이 드는 일이다.
그 어떤 지도를 품에 안고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기쁘다.
갑작스럽게 브런치를 비롯하여 온라인 활동을 3월 말부터 접었다.
내가 인생에서 갈증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어느 순간 명확해졌다.
그냥 모든 것을 중단하고 그 갈증을 풀고 싶었다.
너무 서두른 나머지 가까운 이들에게 내가 이런 마음이 들어서 당분간 쉰다며 자초지종을 말하는 것도 잊었다.
그 길로 서류 준비를 시작해서 6월 초에 주립대 대학원 합격 통지를 받았다.
미국 내 거주하는 Domestic applicant 여서 유학생보다 지원서 제출 데드라인이 긴 입장.
학교에 지원하는데 늦지 않은 것이 행운이었다.
먼저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수업을 등록하려고 스케쥴을 보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특히 그룹 프로젝트를 하는 과목이 너무 많아서 부담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다.
마지막 회사를 그만둔 지 8년.
모든 것은 너무 빨리, 많이 변했으며 함께 공부할 다른 학생들은 현업에 있거나 젊거나 모든 면에서 나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그룹 프로젝트에 뛰어 들면 나 스스로 위축되어 팀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할 듯 했다.
이런 마음을 안고 무리하게 하느니 워밍업을 하는 편이 좋겠다고 스스로 판단하던 참에, 나는 다른 학교의 Non-degree 코스로 우선 시작해 보는 것이 나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 일의 시작으로 거슬러 가보자.
사실 나는 1월 말에 영어시험을 하나 보았다.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영어 스피킹 할 일이 전보다 훨씬 줄어드니,
시험 공부를 2주일 밖에 하지 못하고 그냥 시험을 본 나는 스피킹 점수가 흡족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수의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영어 점수 커트라인을 넘겼고 추가적인 영어 코스 수강도 요구하지 않는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진짜 학교에 가서 공부할 만큼의 자신감은 없었다.
반드시 지원하겠다는 마음도 없던 때라 내 점수는 그리 내세울 것 없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레딧(reddit.com) 에서 나보다 훨씬 점수가 낮은 사람들이 미국에 유학오기 위해 분주하게 서류를 준비하는 글을 여러 개 읽었다.
그들의 점수는 간신히 커트라인을 넘겼기에 학교가 요구하는 영어 코스를 수강해야 하는 경우였다.
그러나 유학을 오는데 있어서 그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오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을 이미 알고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포스팅을 쓰고 또한 간절한 마음이 엿보였다.
그 때가 아마도 3월 즈음이었다.
이 사람들은 하겠다는데 왜 나는 뒤로 뺄까.
대학원 진학은, 아니 컴칼에서 한 과목 듣는 것만도 내게 큰 꿈이었는데...
그렇다. 이 꿈 때문에 영어 시험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그냥 봐 둔 것이었다.
남편이 늦깎이 유학생으로 시카고에 오면서 십 오년 쯤 직장인으로 살던 나는 일을 접었다.
그러면서 미국 가면 나도 남편처럼 언젠가 공부하겠다던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다짐이란 보통 희미해지기 마련.
아닌가?
나는 그랬다.
게다가 친정어머니도, 가장 친한 친구 몇몇도 메신저나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면 늘 나에게 하던 말.
"외국에서 아이들 돌봐야지 네가 바빠지면 애들은 어떻게 되겠어?"
그런데 아이들을 돌보며 공부를 할 수 없는 더욱 구체적인 이유는 고비용 구조였다.
내가 어떻게든 한 과목만이라도 들으려고 알아보면 늘 결론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학비와 시간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유학생 신분이 되어야만 했다. 당연히 유학생의 학비를 내며 유학생 자격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 등록 학점이 요구되었다.
한 과목 정도나 들으며 아이들도 돌보고 어렵지만 공부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결국 나 아닌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학비도 내야 하는 고비용 구조였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컴칼' (커뮤니티 컬리지) 마저 유학생 학비는 따로 적용하니
월급을 받다가 안받는 내 입장에선 수입도 없는데 나를 위해 어떻게 저런 큰 학비를 내나,
이 생각에 매번 알아보다 마음을 접었다.
결국 몇 년 전 내가 영주권자가 되어 소소한 장학금에 지원할 자격이 생겼고,
결국 그 사이 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내 손이 많이 가지 않게 되고,
결국 나는 더욱 나이를 먹어서 지금 미루면 영영 후회할 것만 같은 상황에서 결정을 내린 것 뿐.
나는 브런치에 영어 라이팅에 대해 연재하면서 라이팅에 대한 내 경험과 생각을 차근 차근 공유할 참이었다.
그것이 내 계획이었다.
그리고 나는 총 10편의 글을 썼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일이 생겼다.
내가 진정으로 갈증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정말 잘 알지만 외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내 나이 때문에 억누르며 살아가는 것을.
몇 년 후에 내가 할 말이,
"내가 원래 미국 올 때 이런 이런 꿈이 있었는데 애들 키우다 보니 그냥 아쉽지만 접었어."
또는 "집에서 아이들 라이팅을 가르치면서 애들 잘 키워서 보람있었어." 라면 나는 정말 그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내가 해보고 싶었던 도전을 안해봐도 후회 없을까.
지금보다 더 나이 들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후회 없을까.
내가 현명한 사람들의 현명한 조언을 듣고 잘 따랐음에 안도할까.
아니면 나는 여전히 후회할까.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내가 아는 나에게
이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어떤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이 세상 수 백만명 수 천만명,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품어본 생각이며 못 이룬 일에 대한 커다란 미련으로 보였을 것을 안다.
그러나 타인이 내 마음 속 깊은 좌절, 간절함, 머뭇거림의 강도를 나만큼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단 넉달만에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이 이처럼 낯설 수 있고, 삶의 관심사가 급격히 달라질 수 있다니 놀랍다.
물론 이것을 추진한 건 나 자신이지만 나 자신도 이 과정과 결과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공부를 그저 시작하기 직전일 뿐,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모른다.
이 글은 그저 지금 시점의 기록이다.
내 아이들에게 영어 라이팅을 제대로 가르쳐야 겠다고 생각했을 때 막연히 상상한 장면 하나는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원서를 쓸 때 학교에 제출할 에세이를 쓰는 장면이었다.
그 때, 자기 인생에 일어난 사건을 표현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여전히 내 아이들은 미성년이며 아직 아무도 대입 원서를 쓰지 않았다.
그들을 가르친 내가 지원서를 내고 각종 서류와 학업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영어 라이팅의 수혜자가 되었다.
가장 큰 반전은 나에게 집에서 아이들을 돌봐야지 네가 없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냐고 가장 걱정했던 두 사람 - 친정 어머니와 미국에 와서도 꾸준히 문자를 주고 받은 가까운 친구 - 모두 내가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한다는 사실에 순도 백퍼센트로 기뻐하며 축하해 준 것이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알았다.
자기 일처럼 걱정했기 때문에, 내 아이들을 걱정했기 때문에 나에게 했던 말이란 것을.
그리고 자기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과 똑같이 기뻐한다는 것을.
최근에 모든 선택을 마치고 결정을 내린 후,
한 소셜미디어에 내 소속을 학교로 바꾸면서 참 행복했다.
내 영원한 소속은 나의 가족이지만
당분간 다른 어느 곳에 소속된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