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iHyuk Feb 05. 2016

게이, 일진 그리고 왕따
<바람직한 청소년>

계간 <한국희곡> 2014년 가을

작 : 이오진

연출 : 문삼화

일시 : 2014년 8월 12일 ~ 8월 31일

출연 : 한규원, 민재원, 구도균, 나하연, 문병주, 박원진, 오민석, 한상훈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성실에 갇힌 이레는 끊임없이 되물었다. 그때 내가 그 손을 잡았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끝내 지훈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이래는 사랑한단 말을 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지 현신에게 끝없이 확인받는다. 그런가 하면 현신은 교은과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 이별을 겪고, 양호 선생님은 동료 교사와 불륜관계에 있는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이렇듯 연극 <바람직한 청소년>에서 사랑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자 도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극이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면 사랑과 마주한 청춘의 당혹과 절망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열아홉의 이레는 누구보다 강한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사랑에 고민해야했고 바람직한 어른이 되기 위한 길은 생각처럼 쉬운 길도 아니었다. 이런 이레를 가운데에 두고 펼쳐진 인물들의 다양한 사랑이야기는 이레가 걸어야 하는 길이 일방통행로가 아닌 다양한 교차로일 것임을 예견해준다. 


  과거에 비해 동성애는 이제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웹툰 등 다양한 대중예술에서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소재로 자리 잡았다. 동성애를 그린다는 압박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지금, 이제는 어떻게 라는 문제에 조금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윤리에서 벗어난 자신의 입장을 피할 수 없는 순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현실의 제반 조건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당위성을 획득하는 것이 과연 의미있는 접근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람직한 청소년>은 게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동성애를 설명하는데 에너지를 할애하기보다는 이를 둘러싼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고민함으로써 이야기의 폭을 확장시키는 선택을 하고 있다. 때문에 <바람직한 청소년>은 동성애라는 특정한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사랑과 청춘이라는 좀 더 보편적인 주제에 접근하게 된다.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



  <바람직한 청소년>의 주요 무대는 ‘학교’다. 이레와 현신의 갈등이 벌어지는 반성실은 물론, 사진을 찍어 배포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면서 관객들은 학교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을 무대 위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재현되는 무대는 우리가 지나왔던 그때의 그 학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반성실을 중심으로 무대의 좌우에는 과학실, 교장실, 양호실, 청소실이 숨겨져 있다. 극의 진행에 따라 막이 찢어지며 드러나는 학교의 민낯이야말로 <바람직한 청소년>이 가지는 연극적 미덕이다. 게이와 일진이라는 서로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레와 현신은 반성문을 쓰는 행위를 공유하면서 각자의 이야기에 접근하게 된다. 이레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왼편의 과학실, 양호선생님의 불륜이 밝혀지는 오른편의 양호식, 그리고 현신과 교은의 이별과 지훈의 자퇴가 이루어지는 무대 앞까지 관객들은 그들의 그때를 함께 목격하게 된다. 밤 11시, 불꺼진 학교는 이레와 현신의 응시와 함께 무대로 소환되는 것이다. 

  한편 이레와 현신이 미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반성실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교실로부터 격리된 아이들은 반성문 쓰리를 공유하며 복잡하고 어두운 미궁에 다가갈 힌트를 얻게 된다. 어른들이 원하는 소설쓰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직격하는 예리한 화살촉이 될 때, 자신이 나약한 ‘아이’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진심없이 쓴 반성물을 낭독하는 행위에서 흘리는 눈물은 입구에 연결해놓은 실을 놓쳐버린 테세우스와 다름없다. 반성문에 쓰여진 이야기가 곧바로 현실과 조우할 때 이는 고통으로 전위된다. 학교라는 미궁을 응시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대가는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미궁을 존속케하는 미노타우루스는 누구인다. 역설적으로 이 미노타우루스는 미궁 그 자체인 학교가 된다. 무대 위에 자리잡은 “미래를 선도해갈 자랑스러운 하필인 육성”이라는 문구는 이 미궁을 운행하는 정언명령이다. 교장이 바뀌고 학생주임이 바뀌고 일진이 바뀌고 왕따가 바뀌어도 여전히 학교는 어두운 미궁일 것이다. 



하필, 바람직해야 했던 아이들



  이레는 전교 1등의 모범생이었지만 동시에 어른들의 지탄을 받는 게이다.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 위한 선택은 어른들이 그토록 원하던 공부였다. 때문에 반성실에서도 학생주임보다 우위에 서려는 이레의 기민한 감각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동성애 서사가 그리는 게이들이 약자의 이미지에 함몰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과 달리, 이레가  기존의 문법을 넘어서는 가능성은 권력과 힘에 대한 감각에서 기인한다. 

  이레가 왕따인 봉수를 대하는 장면에서 이런 양면성은 극대화되는데, 자신과 비슷한 소외된 존재에게 건네는 비아냥은 이 연극의 핵심적인 갈등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것이며 동시에 이레를 평면적인 인물형에서 구원해낸다. 사진을 찍었던 범인이 모두의 행복을 못 견뎌했던 봉수임이 밝혀지며 <바람직한 청소년>은 학교 전체의 이야기로 발전해나간다. 결국이 바람직함의 실체는 모두가 거쳐야만 했던 입사(initiation)의 자연스럽고 거대한 과정인 것이다. 이레도, 현신도, 봉수도 이 거대한 과정의 한 부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사랑한다고 말하면



  이레는 물었다. 자신이 지훈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잔인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자신조차 부정해버린 이레는 전화기를 들고 사랑을 고백한다. 바람직하지 못했던 청소년들이 바람직해지는 과정을 목도한 순간, 관객들은 자신이 지나쳐온 청소년기를, 혹은 잊었던 첫사랑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바람직해지며 막을 내리는 <바람직한 청소년>이 현실의 해답을 관객들에게 손쉽게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 무게는 가볍지 않다. 어쩌면 공동체의 윤리를 배반한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이 연극은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레의 고백도, 현신의 이별도, 지훈의 용기도 바람직하지 못한 자신을 껴안는 가장 성숙한 방법일테니.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이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