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경기문화재단 별별프로젝트 <동네영화 물물교환>
천만 영화가 난립할 정도로 스크린 시장이 활발한 2015년의 한국에서 영화의 위상을 묻는 것은 첨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구경이라는 표현이 아스라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듯이 영화는 단순한 유흥거리를 넘어 한국인들의 일상에 자리잡고 있는 친숙한 대중예술이 되었다. 1900년을 전후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수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영화가 100여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가장 친숙한 대중예술이 되기까지 수많은 영화인들과 투자자들, 관객들은 스크린을 통해 희로애락의 예술적 체험을 함께 했다.
이 과정은 거대 자본이 영화와 조우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평론이나 학계를 관객이 과감하게 뿌리치는 과정이기도 했다. 몇천억이 투자된 블록버스터 영화가 흥행 챠트를 갈라먹는 한편 소리없이 사라지는 저예산 영화들을 관객들의 힘으로 다시 극장으로 불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스마트폰만으로도 일반 관객의 영화 제작이 가능해진 시대에 영화라는 대중예술은 어떻게 사람들과 조우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이란 점에서 <물물교환>은 단순한 영화제작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 <물물교환>의 상영회가 열린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의 한 건물은 실제 영화의 촬영지였다. 공사 기간 동안 협조를 구했던 이 건물은 다세대 주택을 위해 축조된 건물은 원흥동 곳곳이 공사를 위해 만들어진 벌판 한 가운데서 음산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개발의 부푼 꿈을 안은 부동산 투자자들에게는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작 원흥동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눈에는 잔해물만이 남겨진 폐허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조우리 소설가의 원작 「물물교환」(웹진 문장)이 언어로 그려낸 풍경이 조세영 감독의 카메라를 거치면서 시각화된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조우리 소설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공사장을 지키는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다. 딸의 과외비라도 벌기 위해 공사장을 지키는 중년여성은 소장의 횡포에는 침묵하지만 폐자재를 주워가는 할머니에게는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다. 겉으론 별 내색을 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와 부조리한 대응에 대해 고민하는 중년여성의 목소리는 내면의 혼란과 수치심을 수시로 드러낸다. 반면 영화 <물물교환>에서는 내면의 목소리를 영화적인 언어로 기술해낸다. 중년여성의 불안한 눈빛은 공사장 내에서 당해야하는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소장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일당을 떼일 때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목소리 대신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이 모든 부조리한 상황을 참고 기어이 받은 돈마저 소장이 가로채고 남은 것임을 깨달은 여인이 소장의 차를 깨부수는 행동은 영화 전체의 주체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중년여성이 당한 부조리와 폐자재를 주워가는 할머니에게 했던 행동이 모두 기록된 블랙박스를 스스로 깨는 행위는 개발의 환희 이면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영화적으로 가시화시킨다. 기실 영화 초반 공사건물의 단단한 벽과 대조적으로 흩날리는 포장재는 부동산이 실제로는 연약하게 흔들릴 수 있는 환영과도 같은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개발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주위를 떠도는 환영처럼 연약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개발과 투자라는 경제적 기대감은 허망한 그림자와도 같다. 누군가의 삶을 몰아내고 차지하는 자리가 오롯이 밝을 수만은 없다. 때문에 중년여성이 공사장을 맴도는 것은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년여성은 영화에 그려진 것처럼 딸의 과외비라도 벌기 위해 일을 나선 것이지만, 개발에 따른 부동산 투자의 과실을 따먹기 위해 (영화에서는 모호하게 처리되지만) 몸을 팔아서라도 공사장을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 말라비틀어진 한라봉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양가적인 행동이 필연적으로 빈 손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때문에 폐허와도 같은 공사터를 뒤로 한 채 할머니가 건네는 작은 귤(소설에서는 참외)을 받는 장면은 그녀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따내려던 과실보다 하찮게 느껴지는 작은 단위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겨준다.
이쯤되면 마치 황금알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개발의 논리가 실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외로 인해 완성된다는 것을 <물물교환>은 그려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노동의 ‘교환’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할머니의 귤과 공사장의 폐자재를 교환하는 것이 돈과 노동을 교환하는 것보다 더 공정(Fair trade)하게 보이는 것은 불합리한 묘사는 아닐 것이다. 개발 자본주의의 논리는 어쩌면 모든 것이 망해버린 공사(工事)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영화 <물물교환>은 한 중년여성의 삶을 따라가며 개발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신화가 놓여진 토대를 천착한다. 소설의 주무대와 상관이 없음에도 이제 개발이 시작되어 공사장이 여기저기 펼쳐진 원흥동 일대가 영화의 배경이 된 것은 마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환상을 뒤집는 선택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단순히 불합리한 취급을 받는 노동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겪는 젠더의 문제와 젠트리피케이션에 가까운 기존 빈곤층 주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물물교환>에 의해 전유된 소설 「물물교환」의 밑그림은 이렇듯 지금 여기를 무대삼아 부동산이라는 재화가 얼마나 잔인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그려낸다.
작가 김수연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활동을 하는 두 명의 예술가를 잇는 네트워킹을 구상해냈다. 소설가와 감독은 고유한 미디어를 통해 각자의 그림을 그려내는 예술가지만 이 그림을 함께 그려냈을 때 딸려오는 효과들은 단순한 산술적인 합산에 머물지 않는다. 같으면서도 다른 문제의식이 미디어를 횡단하며 또 다른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다른 방식으로 관객 혹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 텍스트가 가지는 힘은 하나 이상이 된다. 따라서 프로젝트 <물물교환>은 소설과 영화, 작가와 감독을 연결한 김수연 작가의 네트워킹이 결코 섣부른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그리고 이 네트워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의 마을을 경유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