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경기문화재단 별별예술프로젝트 <오길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한다. 출생과 함께 인간은 죽음의 공포와 대면해야 하고 그 두려움과 함께 평생을 살아간다. 프로이트가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의 증상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죽음이 가지는 무게에 대한 체감은 어렵지 않다. 특히 관혼상제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지언정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의례다. 이 중에서도 죽음(喪)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무게를 지니고 있다. 출생의 기쁨과 대조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슬픔은 불가해함이라는 크나큰 장해물을 안고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아무도 경험할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에서 시작된다. 특히 주변 사람의 죽음은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은 ‘나’를 흔들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며 삶의 질서를 뒤흔들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장근희 작가는 오길림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삶의 이면에 언제나 숨 쉬고 있는 죽음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늘 산 자들의 곁에 있지만 쉽게 인식되지 못하는 죽음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죽음의 공간, 삶의 시간
프로젝트 <오길림>은 장근희 작가의 할머니인 오길림이란 분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현대적인 교육을 받고 예술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해온 장근희 작가와 달리 전라도에 있는 섬 하태도에서 살아온 오길림 할머니는 지극히 단조로워 보이는 전원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그저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종의 미시사로 받아들인 장근희 작가는 직접 하태도를 찾아 오길림 할머니와의 조우를 시도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영상 작업을 통해 한 편의 영상에세이가 된다. 오길림 할머니의 사적인 일상을 더듬는 것부터 ‘저포놀이’의 재연을 통한 저승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이 과정은 도시/농촌, 근대/전근대의 명확한 경계선을 의도적으로 흩뜨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거대한 틈을 한 개인의 작업만으로 메우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는 있다. 장근희 작가의 <오길림>이 삶과 죽음의 피상적인 접근에만 머물지 않는 것은 이 경계를 의식하고 끊임없이 그 선을 찾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태도 안에서 그저 일상적인 삶의 양면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역사를 둘러싼 독특한 감각이 존재하고 있다. 할머니가 살았던 하태도는 프로젝트의 특성 상 죽음이라는 특정한 이미지로 점철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은 장근희 작가의 삶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죽음은 삶의 방해물이나 균형을 저해하는 불순물이 아니다. 삶의 전제 조건으로서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고, 여기 산 자들의 역사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독특한 시간관념은 개인의 역사가 서사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제서야 비로소 <오길림>은 할머니만의 이야기가 아닌 장근희 작가 개인의 서사가 된다. 그렇게 보자면 하태도에서의 작업은 개인의 역사가 쓰여 지고 축적되는 과정에 대한 탐구가 된다. 이때 <오길림>은 한 개인의 역사를 넘어서 삶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승화된다.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는 것이 식상한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죽음의 무게와 삶의 무게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식의 전환은 쉽지 않다. 죽음을 이루는 것은 삶이고, 삶은 언제나 죽음과 연결되어있다. 말하자면 삶의 아카이브(archive)로서 죽음이 재맥락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리트머스 레지던시의 입구에서 수시로 상영되어 죽음이 삶의 서사로 기능하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때문에 리트머스 레지던시는 죽음과 삶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공간이 된다. 이곳은 죽음의 공간뿐만 아니라, 삶의 시간이 존재하는 독특한 임사체험의 공간이 된다.
어둠 그 안에서
프로젝트 <오길림>이 한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는 수준이었다면 죽음은 그저 오브제(objet)에 머물렀을 것이다. <오길림>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는 리트머스 레지던시를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처럼 그려낸다. 입구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재생되는 하태도에서의 영상 에세이를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독특한 공간이 존재한다. 벽을 간간히 메우고 있는 식물들 사이로 중앙에는 간단한 먹을 것이 차려진 상이 놓여 있다. <오길림>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상을 중심으로 앉아 죽음에 대한 간단한 소회와 자신이 겪고 느꼈던 죽음을 타인들과 나누게 되는데 이때 사방의 벽에는 이전에 <오길림>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같은 고백을 나누었던 장면이 등사된다. 마치 삶의 순간들이 환영처럼 펼쳐진 공간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곳은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인 연옥이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리트머스 레지던시는 옥상에 설치된 작은 사무실 같지만,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오면 죽음의 임사체험이 가능해지는 고유한 공간이 된다. 레지던시 곳곳에 설치된 오브제들만큼이나 어두운 조명들, 그리고 벽을 가득 채운 산 자들은 환영처럼 이 공간을 떠돈다. 이것을 완성하는 것은 산 자들의 고백이다. 산 자들의 목소리는 서로 맞물려 죽음의 의미와 고통에 대해 토로하지만 그것들은 귀를 때리고 지나쳐갈 뿐이다. 여기에는 죽음과 함께 엄연히 삶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의미도 명확하게 각인될 수 없다.
또한 <오길림>이 전시된 바로 아래층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고시원이 있고, 리트머스 레지던시의 주위로 형성된 안산공단은 삶과 죽음을 가늠하는 선마저 희미해져버리는 거대한 암흑이 된다. <오길림>을 찾는 한국인들과 달리 생계라는 이름으로 삶과 죽음 사이를 무표정하게 건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밖을 배회하는 것 역시 <오길림>이 놓여진 무대가 지금 여기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환기시킨다.
<오길림>의 생경한 목소리가 거대한 슬픔의 도시가 되어버린 안산의 얼굴을 감쌀 수 있다는 기대감을 여전히 지울 수 없다. 안산시에서 치뤄진 세월호 거리 추모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장근희 작가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슬픔이 우리의 일상으로 전이될 때 비로소 우리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안산이라는 도시는 2015년의 한국이 거쳐 온 과거와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압축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이 깊은 어둠의 사이를 찢고 연결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라는 거대 서사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들)의 서사는 이제 겨우 쓰여 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