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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Jan 28. 2016

그때 그 사람들

2015 경기문화재단 별별예술프로젝트 <뿌리와 꼭대기>

  언젠가, 과거의 어느 날 지도에는 없는 마을이 탄생했다. 조선 중기의 선비 신석이 판미동(현재의 가평으로 추정)이라는 새로운 마을을 세운 것이다. 자세한 내막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석이 세웠던 계획은 당시 조선을 감싸던 유교적 이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분제를 따르는 기록은 전무한 반면, 마을 공동체의 소통 체계를 일원화시켜 민주적으로 보일법한 평등한 기반을 세워놓았다. 엄격한 규율과 협력이라는 이상을 통해 유지되던 판미동은 100여년의 시간동안 존속해왔지만 혼란스러운 18세기로 접어들며 희미해져갔다. 

  자칫 고문서에서나 존재할법한 판미동의 존재를 끄집어낸 이로경의 작업은 흥미롭다. 대체 부족할 것 없었던 양반 신석이 산 속 깊은 곳에 유토피아와 같은 마을을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인지, 대체 이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나아가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로경의 질문은 잊혀질법한 조선시대의 유토피아를 현재의 시간으로 끌어들였다. 때문에 문서의 기록을 토대로 현대의 판미동을 재구성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고증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판미동’이라는 환상의 공간을 통해 새롭게 펼쳐질 가능성을 얻은 것은 아닐까. 이로경의 작업은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을 ‘판미동’이라는 잊혀진 이름을 통해 연결해내는 독특한 아우라를 갖고 있다. 


실종의 유토피아

  이로경의 초기 작업은 판미동에 대한 실증적 작업에 국한되지 않았다. 선비 신석이 추구했던 유토피아의 ‘관계’에 천착한 그는 당시 시대적 맥락과 선비 신석의 내면적 변화에 주목했다. 예컨대 17세기 후반의 조선이 겪어야했던 정치적 혼란(당파)과 경제적 위기가 신석으로 하여금 도피에 가까운 행동을 낳았다는 것이다. 물론 문서에는 왜구 침입 등의 소문에 불안에 떨던 신석이 산 속으로 피신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색한 부분이 있다.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마을을 꾸렸다는 점, 유교적 이상과 배치될 수도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한 점 등은 도피적 행각으로만 보기 어렵다. 더구나 대규모의 경제력이 신석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동원된 사실은 판미동이 우발적인 행동의 산물이 아닌 치밀한 계획을 통해 수립된 공동체 프로젝트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게 보자면 넉넉한 재력을 갖추고 있던 선비 신석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상실에 대한 불안을 토대로 실종의 유토피아를 구축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초기 계획이 수정되어 나온 영화 <뿌리와 꼭대기>는 판미동이라는 흥미로운 공간을 2015년의 한국으로 소환했다.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하는 이름 없는 사내는 텅 빈 마을에서 홀로 살아간다. 좁은 공간에서 밥을 지어먹고, 휴대용 가스가 떨어지자 생쌀을 씹어 먹는 사내는 혼자만의 놀이를 통해 빈 시간과 공간을 채워간다. 

  홀로 살아가는 사내와 달리 젊은 커플은 펜션에 일박하기 위해 산을 찾았다. 적당히 황량하고 적당히 후줄근한 펜션에서 커플들은 결혼과 삶에 대해 갈등관계를 보인다. 이들이 겪는 주된 문제는 자신의 불안정한 상황을 결혼이라는 현실과 섣불리 대응시키지 못하는 남자의 소극적인 태도에 있다. 때문에 홀로 사는 사내가 인적이 드문 펜션 주변에 나타났을 때 남자는 경계심을 보이기보다 환대를 보인다. 결혼 이야기를 방해하는 사내의 등장을 못마땅해 하는 여자를 뒤로 한 채 라면과 쌀을 나눠주는 남자는 사내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다. 


  물론 사내가 꺼내는 이야기는 황당하다 못해 한심하다. 산 속에 틀어박혀 속세와 인연을 끊고 공부를 하며 젊음을 낭비하는, 말하자면 잉여와 다를 바 업는 삶을 사는 사내는 세상과 유리된 존재다. 현실적인 경제 문제와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앞둔 여자에게 사내의 존재는 그저 치워버려야할 쓰레기의 수준인지도 모른다. 사내가 산 속으로 들어간 이야기는 여자에 의해 가로 막히고, 그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만이 남는다. 


  <뿌리와 꼭대기>는 판미동이라는 환상의 마을에 대한 이로경 작가의 호기심이 실증적인 작업과 만나면서 만들어진 영화다. 사내는 판미동의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사내가 하던 놀이와 해먹는 밥 그리고 그가 몰두하던 공부까지, 마치 지금의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환상이 판미동을 감싸고 있다. 젊은 커플은 결국 하루 숙박을 하고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그 이후에는 전쟁과 같은 삶이 지속될 것이고 결혼이라는 일생의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머리를 싸맬 것이다. 산 속에서 만난 사내 따위는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실종자, 어쩌면 유토피아의 가능성은 실종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통해 도래할지도 모른다.  


고립위기의 양식

  사내와 젊은 커플의 만남이 주는 긴장감은, 단순히 사람을 만났다는 추측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깊고 어두운 산 속의 밤에 나타난 사람이 위해를 가할 범죄자 혹은 정신병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뿌리와 꼭대기>는 범죄물이나 공포물의 장르적 특성에 기대지 않고 진솔한 판미동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낸다. 젊은 커플이 살아가야할 세상과 홀로 남은 사내가 살아갈 세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때문에 사내가 사는 판미동을 실패와 좌절의 공간 혹은 신비화된 공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신석이 처음 판미동을 세우던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정치적·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개인이 스스로의 안위를 지킬 수 없었던 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오히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 생존을 결정짓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신석이 꿈꾸던 판미동은 조선 사회의 분위기와는 반대 방향을 지향한다. 지금의 한국에 판미동이 남아있다면, 혹은 다시 만들어진다면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시 쓰여질 것이다. 


  위기의 사회가 되어버린 2015년의 한국에서 사내가 선택한 고립이라는 행동양식은 어떤 면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선비 신석이 그토록 만들고자했던 세계는 작은 마을 단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다른 삶’으로 확장된다. 이때야 비로소 마을과 이웃의 의미는 재정의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위기의 시대, 위험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시인, <그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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